약속(約束)은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풀어보면 약속은 과거나 현재와는 관련이 없는 시간, 즉 미래형의 언어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해 유무형의 다짐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약속은 반드시 둘 이상의 존재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 약속만큼 자주 있는 일도 그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약속의 무게를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 한 소절. 미생지신(尾生之信)은 약속과 관련한 워낙 유명한 일화다.
미생이란 사람의 믿음이란 뜻으로, 미련하도록 약속을 굳게 지키는 것이나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여자는 결국 오지 않았다.
반드시 올 것이라는 여자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그는 큰 비가 내려 하천이 불어 물이 차오르는 데도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교각(橋脚)을 끌어안고 죽었다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다양한 생각들이 있을 테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미생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저버린 여자에게 있다.
이미 그런 성향의 사람인 줄 알았을 터, 그러면 애초에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약속을 지켰어야 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라면 전언(傳言)을 할 방법을 강구했어야 했다.
물론 때맞춰 큰 비가 내릴 줄도, 물이 불어 차오를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변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약속을 어긴 사람들이 선택하는 가장 편한 것이 핑계와 변명이다.
글을 쓰는 필자로서는 원고 청탁에 대해 무척 강박이 있는 편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안 되는 소위 삼류 시인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청탁을 받으면 기일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무게감은 그리 가볍지 않다.
일단 입에서 말이 떨어지면 그 말에는 반드시 실천이라는 행동이 요구된다.
개인과 개인 간의 사적인 약속도 그러할진대, 대 사회적 약속은 그 무게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 사회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다. 남북문제는 물론 국제정세의 불안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 상황 또한 나날이 막장드라마를 시청하는 느낌이 든다.
날이 바뀔 때마다 다음 편에 전개될 스토리가 궁금해 기사를 검색하고 뉴스를 들여다 본다. 사회가 그러하다 보니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적고, 소설의 판매 부수도 줄어든다는 우스개마저 있다.
도대체 이 사회는 어디를 향해 흘러갈 것인가.
이 모든 혼란의 근본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의 위반이 깔려 있다. 더구나 내 편의 위반은 그럴 수 있는 일이고, 상대편의 위반은 용서받지 못할 과오라는 식의 정치행태에도 문제가 있다.
과연 자신들은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스스로 한 약속들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상대방을 향해서만 손가락질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과연 나는 타인과의 약속에 대해 얼마나 무게감을 느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진지하고 충실했는지, 사소한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는지를 다시 짚어봐야 할 것이다.
장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경구가 깊이 와 닿는 11월이다.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실행에 있어서는 가장 충실하다.’
<제주일보>(승인 2016.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