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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Oct 23. 2024

내 마음의 산티아고 15

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다.


2월 22일 토요일, 카미노 제12일.

리바디소에서 아르카도피노까지 22.2Km


 이소 강을 배경으로 알베르게 마당에서 사진을 찍고 리포랑 같이 출발한다. 촐루카는 어제 우리를 앞서가고, 함께 숙박했던 이탈리안은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다. 이 알베르게는 주방, 앞마당, 그리고 마당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 그리고 오래된 다리까지 그 경치가 정말 좋은 곳이다. 

  밤 사이 몇 번 잠을 깰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더니 출발하는 내 등 뒤로 아침 햇살이 빛난다. 밤 사이에 내린 비 때문인지 오늘 아침은 작은 새소리가 요란하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비가 이 새들에게도 넉넉한 양식을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산티아고가 속해 있는 갈리시아 지방은 지금이 우기라고 한다. 나의 이번 카미노 중 거의 매일 많거나 적은 비가 내렸다. 레온 산맥은 큰 눈을 헤치고 넘었다. 

  이 많은 눈과 비는 물길이 아닌 곳도 물길로 만들어 순례자들의 신발을 적시거나 더럽히기도 깨끗이 씻어주기도 했으며, 물이 지나는 곳곳의 땅을 비옥하게 하고 초목을 푸르게 하며 작고 큰 동물들에게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축복의 원천이라고 생각된다. 내 나라에 비하여 위도가 낮은 이곳은 고산지대가 아니면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양이며 염소며 젖소가 그 초원의 주인이 되어 노닐고 있고, 여러 가지 화초도 한 식구가 되어 그들을 축복하고 있다.

  2월 하순에 접어든 이곳은 봄을 준비하고 있다. 곳곳에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축들도 활기차게 자기 공간을 뛰어논다.      

  또 한 떼의 순례자들이 지나간다. 그들은 시끄럽고 정력적이고 가방이 작으며 옷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사리아 정도에서 시작한 순례증명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리라. 거의 800Km를 걸어온 나의 동행자 리포는 지친 표정과 지친 몸, 그리고 지저분한 차림새이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아름다워 보인다. 나도 이 형형한 눈빛이 아름다운 무리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다. 

  산티아고가 가까워 올수록 분주함이 더해진다. 이제는 어디로 눈을 돌려도 자그마한 녹색들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던 주변 환경은 끝나고, 큰 건물이나 속도에 취한 자동차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내 마음도 서서히 순례의 마무리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돌아가서 다시 소중히 여길 내 일상이 떠오른다. 

  어젯밤에는 짐을 많이 정리했다. 순례를 끝낸 사람으로부터 마드리드에서 얻은 bed bug 퇴치약과 보조 모포를 버렸다. 모직 속옷도 벗고, 남아 있던 보조 영양제는 모두 먹어 치웠다. 

  내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원래 있던 길 그대로이다. 앞으로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간 후에도 길을 그대로일 것이다. 우리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면 이렇게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리라. 기뻤던 일, 힘겨웠던 일 모두 한 순간일 뿐인데, 마치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교만을 부리거나 힘들어 죽는다고 아우성치고 엄살 부리지는 않았는가? 


  산티아고 입성을 하루치 정도의 거리를 앞두고 알베르게에 든다. 그동안의 알베르게와 달리 도시에 있는 알베르게다. 규모도 크고, 주방도 넓다. 투숙객도 제법 있다. 

  침대를 잡고 슬리핑백을 펴 놓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웬 남성이 한국인이냐고 우리말로 물어온다. 내가 샤워하는 동안 리포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가 한국 여성과 함께 카미노 하였노라고 대충 이야기한 모양이다.

  이 남성은 신 OO 씨로 내가 카미노를 시작하기 전, 카페에서 마이너스손이라는 아이디로 많이 보았으며, 카미노 중의 방명록에서도 몇 차례 만났던 인물이라 반가웠다. 나보다 여러 날 전에 출국하여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풀코스 800여 Km 카미노 하는 중이며, 중간중간에 시간을 많이 잡아서 카미노를 해 왔기 때문에 여기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카미노 중 한국어 한 마디도 못 해 보았어요.”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핑 돈다. 나의 카미노 내내 동행해 준 리포나 촐루카도 고맙지만, 산티아고 입성을 하루 앞두고 만난 ‘마이너스손’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큰 주방에서 ‘마이너스손’과 와인을 앞에 놓고 서로의 카미노 경험을 나눈다.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그동안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 구사하는 리포와 영어로 대화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득의의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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