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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Oct 23. 2024

내 마음의 산티아고 14

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핸드폰도 없이 카미노에 집중하는 남자와도 한 방에서 자 보다.


2월 21일 금요일. 카미노 제11일. 

팔라스 데 레이에서 리바디소까지 26Km


 산티아고 입성이 가까워지니 역시 사람이 많다. 타이완과 스페인 혼혈이라고 하는 미국 청년과도 합류한다. 훈남으로 1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페북에서 친구 맺기를 청하고 있다. 타이완인 리포와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나에게도 관심을 표한다. 키도 크지만 걸음이 무척 빠르다. 이즈음에서 합류하는 사람들은 짧고 귀한 휴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직장인들이라 마음들이 급한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순례에 집중하던 우리와는 달리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어 하고 많이 경험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들의 그러함도 받아들일 줄 아는 카미노의 여유 있는 선배가 되어 있다고나 할까? 일행과 사진을 찍는다. 나의 카미노 사진 중 가장 인물의 수가 많은 사진이다.    

  12시에 브레이크 타임을 가진다. 커피와 수프를 주로 먹고, 3시 30분 다시 브레이크 타임을 가진다. 이때는 맥주를 마신다. 

  2차 휴식 타임을 가진 후 슈퍼에 들러 소시지, 빵 등을 산다. 새 멤버 2명과 촐루카는 먼저 간다. 이제 일행은 다시 독일 여성 2명과 리포, 나 이렇게 4명이 되었다. 30여분을 가다가 독일 여성 에버린이 화장실 볼일을 본단다. 리포와 나는 계속 카미노. 우리는 걸음이 느리고 두 여성은 걸음이 빠른 편이라 기다리지 않고 계속 갔는데, 두 시간이 지나도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소 강을 건너 알베르게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을 못 만났다. 리포 말에 의하면 리사가 다리가 불편하여 아마 중간에 어디서 묵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독일 여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리포가 나랑 있을 때보다 생기가 돌았었는데 아쉽다. 

  카미노 중 하산 길의 인가 창문 너머로 TV가 켜진 실내가 보인다. 갑자기 나의 가정이 그리워진다. 집 떠난 지 2주. 각오와 결의 때문에 한동안 잊혔던 내 일상이 이제 순례의 결의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음이 느껴진다. 

  7시 30분 이소 강변의 리바디소 알베르게에 든다. 넓고 아름다운 뜰이 있다. 바로 앞에는 아름다운 개울이 흐르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아니라면 어느 한 철 이런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낸다면 왕후장상이 안 부러울 듯하다. 리포를 만나 함께 카미노 한 지 10일 정도 되는 것 같다. 리포는 그동안 혼자 다니다가 나의 동행 제의를 받아들여 나와 함께 다니고 있다. 그동안 촐루카가 함께 있어 주었고, 또 숙식을 함께 해 주었다. 그 외에도 잠깐씩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둘이서 호젓하고 분위기 좋은 알베르게에 들게 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네. 리포는 아무 느낌이 없을 것이나 나는 살짝 부담스러워진다. 그러나 이내 부담감이 사라지는 일이 있을 줄이야. 2층 침대 두 개가 있는 작은 방을 배정받고 보니 이탈리안 남성이 먼저 들어와 있다. 훈남이다. 카미노 중 꼭 하는 일 하나. 카페나 알베르게에 들면 와이파이 비번을 물어서 나의 안전을 집에 알리고 또 집에서 온 소식을 확인하는 것이다. 먼저 있던 이 남성에게 와이파이 비번을 아느냐고 물으니, 헐! 자기는 카미노에 집중하기 위해 핸드폰 안 가지고 다닌단다. 그래, 이런 정신이 필요한데, 나는 왜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소식을 주고받았을까? 몸은 순례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속세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영원히 벗어나지도 못할 것을 몸부림만 치는 것은 아닐까? 

  이 이탈리아 남자. 핸섬하고 목소리도 좋고 생각도 바람직한데 지금 어떤 애로 사항에 직면하고 있다. 내가 걸은 카미노 기간 내내 맑은 날은 거의 없고,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거나 했었다. 눈이 녹아 개울처럼 흘러내리는 길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이번 카미노를 위하여 K2 방수 등산화를 거금을 투자하여 준비했다. 신발끈을 수동으로 묶는 방식이 아니라 조그셔틀처럼 돌리는 것이어서 물에 젖어도 난로가에서 조금만 말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신형 등산화인데, 이 이탈리안의 등산화는 이런 환경에서 신발끈이 완전히 망가져서 조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어디서 이쑤시개를 구하여 그것에 의지하여 신발끈을 묶으려 애쓰고 있다. 벌써 상당한 시간을 이 짓으로 씨름하고 있으나 성과는 없는 듯. 그래도 정신은 말짱하여 처음 보는 동양여자인 나에게 카미노에 임하는 자세를 진지하게 말해 주었구나. 고맙다. 

  May I help you? I have a needle and thread. 그리고 바늘과 실을 꺼내어 칭칭 동여매는 시늉을 해 준다. 이 이탈리안이 썩 내키어하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달란다. 그리고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신발끈의 끝을 실로 챙챙 동여매고 거기에 바늘로 찔러서 신발끈을 묶는 데 성공한다. Thank you를 연발한다. 내 딸들은 도대체 엄마는 치밀하게 카미노 준비 안 해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들 도움만 받느냐고 하지만, 나도 이번의 도움 말고도 여러 가지 도움 주면서 카미노하고 있음을 알아 다오. 내가 이번 카미노 준비를 위하여 네이버의 카미노친구연합(약칭 카친연)이라는 카페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얻었다. 바늘과 실도 필수 품목이었다. 카미노를 하는 서양인들의 의복이나 장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하여 많이 허술한 편이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도나 동남아 나들이 가는 정도로 카미노를 하는 것 같다.  

 이 알베르게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순례자 병원 중 하나를 재건축한 건물로, 주변 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는 건축의 묘미를 경험할 수 있는 건물이라는 안내가 내 안내 책자에 나와 있다. 리포는 자기 식량을 들고 주방으로 간다. 나는 저녁을 건너뛰고 그냥 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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