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옷 입고 싶을 때 입고 옷 벗고 싶을 때 벗을 수 있다면 진정한 카미노가 아니다.
2월 20일 목요일. 카미노 제10일.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까지 26.1Km
9시 포르토마린 Portomarin의 O'Mirador(고도 420m) 숙소를 나선다. 미뇨 강의 벨라사르 저수지를 향하여 심호흡과 간단한 체조를 하며 동행자들을 기다린다. 모두들 단단한 채비를 하고 나타난다. 어제 오후부터 우리 일행은 5명이 되었다. 우리는 일단 바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한다. 동양인인 나와 리포는 숙소에서 각자의 음식으로 간단한 식사를 끝내 상태이고 나머지 서양인 3명은 바에서 식사를 한다. 앞에 있는 슈퍼에서 점심거리로 빵과 과일을 약간 사서 배낭에 넣는다. 12세기에 지었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니콜라스 성당의 아름다움을 감상한 후 오늘의 순례길을 떠난다.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곧 그치고, 또 내리는가 싶더니 또 그친다. 무지개다. 나무에 걸쳐진 무지개.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에 바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네 인생에도 이렇게 찰나로 끝나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뻤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아팠던 순간….
살아오면서 내가 내뱉은 말들 중에 다른 사람의 가슴에 비수가 된 말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도 않고 철없었던 말인데, 그 당시는 제법 심각하게 했던 말, “내 소원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두 아이 양육과 남편 뒷바라지가 너무 힘든 시간이 많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즈음, 그들이 방학이면 나는 더 힘들어지고 심지어는 내 딸이 “엄마는 방학이 되면 포악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그럭저럭 아이들은 자라서 자기 시간을 필요로 하는 기간이 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엄마와 함께 시간 보내기를 부담스러워하더니, 이제는 각자 제 짝을 찾아 떠났거나 떠나려 한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어찌 미래의 행복을 꿈꿀 수 있으랴? 카미노 중인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리라 생각해 본다.
내복을 벗을까 입을까 망설이다가 입고 출발했는데 판초를 덧입은 지금 엄청 덥다. 그러나 내복을 벗을 여건은 안 된다. 땀과 비로 꿉꿉한 이 상태로 얼마를 가야 할까? 옷을 입고 싶을 때 입고 벗고 싶을 때 벗을 수 있다면 진정한 카미노가 아니다. 이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 카미노의 한 부분이라 생각해 본다. 덥고 축축한 상태로 우리 일행은 전진한다.
닫힌 바가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이 바 앞 공간에 적절히 앉아 휴식 겸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한다. 바로 이 순간이다. 나는 지금 옷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배도 고프지만 음식은 가면서도 질겅질겅 씹어 먹을 수 있지만, 내복을 벗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정말 참기 힘든 상황이 오리라. 나는 주변을 살펴 헛간으로 찾아 들어간다. 내복 벗기에 성공.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는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점심 식사를 한다. 빵 2개, 하몽 1장, 바나나 한 개. 우리 일행은 모두 식사를 끝내고 갈 채비를 한다. 나도 허겁지겁 짐을 꾸려 따라나선다.
점심 후 비는 그치고 해가 난다. 축축해진 옷이나 가방도 좀 뽀송해진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땀에 젖은 옷을 벗을 수도 없이 한 시간, 두 시간을 걸어야 생존이 가능한 이 경험이 없는 자와 어찌 인생을 논할 수 있으랴?
신은 우리 인간에게 견딜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젖은 옷으로 걷기가 힘들었지만 견디고 나니, 옷 갈아입을 시간을 주신다. 옷 갈아입은 후에는 또 적절한 햇빛을, 햇빛 속에 걷기를 한 시간여. 옷 상태가 적절해지고 상쾌해진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평화로움의 이유로 아담하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돌담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길을 들겠다. 똑같으면 똑같은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대로. 소똥으로 질퍽한 길도 잣나무 숲길 못지않게 순례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준다면 다른 사람들이 믿어줄까?
오늘은 사람도 차도 많이 본다.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은 휴식보다는 피로감을 더해 준다. 자동차가 지나가지 않는 포장도로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는데, 오늘은 차가 쌩쌩 달리는 문명 세계의 경험 시간이 제법 있어서 피곤함을 더해 준다. 돌아가서 살아야 할 나의 세계도 그러한 곳인데…. 그래도 산티아고 가는 길은 차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차도 옆으로 따로 순례자 길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차도와 구분하는 여러 가지 풀과 나무로 편안함을 주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오솔길로 접어든다. 한참을 가니 어디선가 상쾌한 냄새가 난다. 잣나무를 잘라 쌓아 둔 것이 보인다. 잣나무 생가지에서 나오는 냄새는 정말 최고의 냄새다. 아니 향기다.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자극으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지만, 지금처럼 생잣가지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고 휴식이고 치유로 작용한다.
이번 나의 카미노 중에 맡은 또 다른 기분 좋은 냄새로는 장작 타는 냄새를 들 수 있다. 내가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간 대부분의 카페는 벽난로가 있고, 거기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낭만적인 냄새를 풍기며. 겨울 난방을 장작을 때는 벽난로로 하고 있는 이들의 문화는 겨울 순례자들에게 몸과 옷과 마음을 모두 훈훈하고 쾌적하게 해 주고, 또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 준다.
점심을 문 닫힌 카페의 앞에서 해결한 우리 일행 중 서양인 셋은 한 잔의 커피를 몹시 아쉬워하더니, 두 시간의 순례 후 나타난 카페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동양인인 나와 리포도 함께 우유를 마신다.
이 카페는 앞뜰을 좀 색다르게 꾸며 놓았다. 분수대 주위나 잔디밭에 오리, 토끼, 개구리 등을 실물 크기로 조각하여 여기저기 둔 장식물들은, 사진으로 보면 마치 실제 생물들이 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여성 두 명은 차를 마시고도 떠나지 않고 다시 따뜻한 수프를 시켜 먹는다. 우리 일행에서 할 수 없이 떨어진다. 남은 우리 일행 셋은 한 줄로 서서 순례를 이어간다. 또다시 비가 오락가락한다. 한국의 4월 정도 날씨일까? 길옆에 있는 텃밭에 열무가 잘 자라 있다. 열무로 무슨 음식을 하는지 스페인 아낙이 바구니에 거두어들이고 있다.
6시 파라스 데 레이 Palas de Rei에 도착하여 카스트로 Castro 알베르게에 든다. 독일 여성 2명은 우리보다 40분 늦게 매우 지친 모습으로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