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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Oct 22. 2024

내 마음의 산티아고 12

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감히 말한다. 이번 카미노에서 모든 종류의 길을 걸었노라고.


2월 19일  수요일. 카미노 제9일.

칼보르에서 포르토마린까지  27.2Km


  어제 먹은 감기약 탓일까? 아니면 졸루카가 한 조각 먹어보라고 준 화이트 초콜릿 탓일까?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애꿎은 MP3만 여러 차례 반복 수고시켰다. 며칠 전 몰리나세카에서는 감기약 먹고 잘 잤는데, 화이트 초콜릿이 원인인 것 같다. 

  6시 30분 기상. 숙소에 다른 손님이 없어서 비어있는 옆방의 세면실을 이용한다. 잠시 빈 침대에서 아침식사 및 일기 쓰기도 가능하다. 겨울 카미노는 이런 여유가 있어서 좋다. 여름에는 알베르게가 오후 3시 전에 마감된다고 하던데. 

  오늘은 걷기에 특히 조심해야겠다. 오로지 걷는 일에만 집중해야겠다. 여기서 다치면 카미노 완주도 못 하고 가끔 책자에 소개된 사람들처럼 불명예스럽게 한국으로 후송될 수도 있으므로. 

  이제 사리아를 거쳐 포르토마린을 향한 오늘의 순례를 시작한다. 인구 15,000의 도시답게 사리아에 이르기 전부터 번잡함이 느껴진다. 순례길로 드나드는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인다. 자그마한 공동주택들도 있다. 우리는 며칠 만에 대처를 경험한다. 점심을 위하여 슈퍼마켓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한다. 카미노를 향하는 길에는 알베르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크고 작은, 그러나 작자의 특색을 뽐내며. 이전 카미노 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사리아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마지막 거점도시답게 알베르게가 즐비하고, 안내책자에서 들은 바대로 순례자들의 짐을 싣고 가는 차들도 많이 다닌다. 나처럼 노구에 침낭까지 짊어지고 300km는 걸어야 제대로 된 순례라 할 수 있지, 짐 따로 실어다 주고, 숙소며 식당이며 다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 순례라 할 수 있겠어? 교만한 마음이 엄습한다. 이전의 카미노 상에서 만나는 생활인들은 순례자들을 만나면 온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고 걱정해 주는 것이 느껴졌는데, 이 근처에서는 사람들의 표정이 의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도토리가 많이 밟힌다. 도토리나무 아래를 지난다. 밤나무 아래로는 밤나무 잎과 밤송이와 알밤이, 호두나무 아래는 호두나무 잎과 호두가 떨어져 썩어가며 두터운 부엽토 층을 이루고 있다.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의 발자국과 눈비가 이들을 기름진 거름으로 만들어 땅속에 스며들게 하고, 풍성한 열매를 기약하게 한다. 얼마나 축복받은 땅인가 생각한다.

  작고 예쁜 꽃이나 이끼로 덮인 돌담길이 끝까지 이어진다. 돌담길은 인가가 있으면 끊어지다가 또 어디부터 인가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가끔 무너진 곳은 무너진 대로 그 자리에서 또 이끼와 작은 식물을 키우면서. 이 돌담길은 일부는 자연스레 삶의 조건과 함께 만들어진 곳도 있을 것이고, 또 일부는 세계적인 명물 순례길이 된 후 의도적으로 조성된 곳도 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완벽한 길을 만들 수 없으리라. 감히 말한다. 나는 이번 카미노에서 모든 종류의 길을 걸었노라고. 눈길, 물길, 진흙탕길, 흙길, 풀길, 돌길…. 눈이 녹아 흐르는 얼음같이 차가운 도랑을 건너야 하는 길도 있었다. 

  적절한 오르내림이 있는 길을 걸으며 얻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내가 막 지나온 길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머물던 작은 마을도 돌아볼 수 있고, 우리가 넘어온 산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까미노 상에서 만나는 돌담과 돌지붕의 작은 집들. 폐가가 되고만 집들인데도 왜 이다지 아련한 채로 힐링의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모두가 자연 소재이고 또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겨울 끝날 즈음까지 퍼부은 눈이 봄기운을 못 이기고 끝없이 녹아내리는 물로 물길을 이룬 곳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이런 길을 걸은 후엔 흙먼지와 진흙탕으로 더러워진 바짓가랑이와 신발이 완벽한 깨끗함으로 돌아오곤 했다. 할 수 없이 시멘트길인 곳은 시멘트 길의 가운데를 파내고 돌을 깔아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었다. 


  넓은 초원은 봄을 준비하고 있다. 트랙터로 밭을 가는 농부도 보인다. 강아지가 많이 돌아다닌 것으로 보아 여기 절기로는 지금이 새끼를 낳아 기르기 좋은 때인가 보다. 가끔 풀을 뜯거나 휴식을 취하는 젖소들도 본다. 젖소가 새끼를 낳는 것도 본다. 엉덩이 아래로 살덩이가 삐져나와 있고 어미소는 천천히 꼬리로 새끼가 나오는 곳을 철썩거릴 뿐이다. 엄숙한 이 순간 마음이 아프다. 산고를 혼자 이겨내고 있는 저 어미소가.  인간의 욕심에 조금이라도 덜 희생되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인가를 지난다. 까미노 상에 있는 작은 산촌들은 인구가 작은 마을이 많고 어떤 곳은 공식 등록 인구가 1명인 곳도 있다고 한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아는 척을 한다. 만져 준다. 행복한 삶을 기원해 주고 헤어진다. 

  나의 이번 까미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경험한다. 맑은 날은 한낮에 더위가 느껴져 벗을 수 있는 옷은 최대한 벗고 걷는다. 옷 보따리를 따로 하나 들고 걷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까미노 가방은 큰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Cm 이상 쌓인 눈을 헤치고 산을 넘기도 했지만 아래 지역은 민들레나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다.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았다는 표지석을 만난다. 도보로 100Km를 걸었을 때 순례자 증명을 받을 수 있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곳 사리아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순례자 증명을 받을 수 있다는 이 사리아부터의 길은 이전의 길과 느낌이 많이 달라 낯설게 느껴진다. 이것이 순례의 길이란 말인가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우리 셋은 물이 있는 장소를 잡아서 슈퍼에서 준비해 간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 독일 여성 두 명이 나타나 우리가 앉은 장소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독일에서 어제 비행기로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거꾸로 오늘 아침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사리아에 와서 다시 산티아고로 가는 중이란다. 산티아고를 향하여 걷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녀들은 이 순례가 처음이 아니고, 다니던 직장에서 일주일 휴가를 내어 이 길을 걷는단다. 귀한 휴가 기간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한 이 여성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우리 셋은 다시 순례길에 오른다. 어제 한 숨을 못 자서 눈이 감겨 온다. 이러면 안 되지. 각성을 하려 해도 졸린다. 우리 일행은 아침 출발 전에, 카미노 중에, 또 저녁 알베르게에 들면 꼭 OK? 하고 확인한다. 내가 OK! 하는 답을 그들은 고마워한다. 

  지금 나는 OK! 가 아닌데 저들은 눈치를 못 채고 앞장서 가고 있다. 혼자 안간힘을 쓰며 걸어간다. 멀리서 사람 소리가 난다. 그 독일 여성 두 명이 서로 웃으며 재잘거리며 따라온다. 젊은 여성들의 모습과 소리에 여성인 나도 눈이 번쩍 뜨이고 잠이 확 달아난다. 나의  동행자 두 남성은 갑자기 안색이 밝아진다. 나도 덩달아 밝아진다. 리포와는 영어 대화가 길게 이어진다. 졸루카는 갑자기 셔터를 많이 누르고 큰 배낭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젊음은 좋은 것이여!

 저녁 6시. 다섯 명이 된 우리 일행은 미뇨 강 rio Mino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 O'Mirador 알베르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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