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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Oct 13. 2024

내 마음의 산티아고 10

하염없이 내리는 눈에 길도, 성당도, 우리도 곧 눈과 하나가 되다.

2월 17일 월요일. 카미노 제7일.

베가델발카르세에서 포이오 고개까지 20.4km


  6:00 기상. 이제 시차 적응이 끝난 것 같다. 주방이 있는 2층으로 간다. 2층은 건물 내부가 아니고 밖과 통해 있다. 하늘엔 보름을 갓 지난 달이 맑은 얼굴로 떠 있다. 그런데 너무 춥다. 리포가 어제저녁 먹은 것 모두 정리하고, 밥 지을 쌀 씻어 담가 두고, 밀가루 반죽까지 해 두었네. 기특한 녀석. 오늘의 미사 묵상 후, 일기 쓰려는데 볼펜이 안 나온다. 공책 한 바닥을 다 개칠해도 안 나온다. 리포는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어디서 볼펜을 구하나? 이렇게 난감한 일이…… 볼펜 하나 더 가져올 걸…… 내 남편이 감옥에서 했듯이 나도 공책을 눌러서 몇 가지 메모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밥에 불을 넣고 밀가루 반죽 냄비를 불에 올린다. 어제 오는 길에 주운 밤도 칼집을 넣어 같이 굽는다. 주워온 밤 중 가장 큰 것만 썩었고 나머지는 모두 괜찮다. 밀가루 반죽 냄비에서 타는 냄새가 나서 불을 끈다. 밤은 제대로 익었는데. 리포가 올라온다. 굿모닝! Are you OK? 

  리포가 묻는다. 그 독일인 보았느냐고. 아니. 이상하단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소리 내어 기도 후 다시 떠났단다. 이 카미노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시작된 길이기는 하지만, 리포는 종교에 충실한 순례자를 못 보았고, 원래의 의미를 잘 몰랐나 보다. 타이완에는 산티아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세계일주 중 프랑스에서 우연히 산티아고 길에 대해 들었다고 하더니.   

  내가 도움을 받은 네이버 카미노 카페에는 카미노 준비물로 라면 수프가 있었다. 배낭 무게 때문에 수프를 딱 1개 준비해 온 것이 후회된다. 오직 하나뿐인 수프를 끓여서 리포랑 같이 밥을 말아먹는다. 리포는 그걸 맵다고 하네. 사서 들고 다니던 치즈 두 장을 주었다. 혹시나 해서 불 옆에 볼펜을 놓아둔다. 한참 후 써 보니, 헐, 이럴 수가. 볼펜이 써진다. 대신에 몸체는 구부러지고. 집에 돌아가면 알아봐야겠다. 온도가 몇 도 이하일 때 볼펜 잉크가 얼어붙는지. 볼펜 잉크도 얼어붙는 날씨에 난방도 없이 잠을 잤단 말인가? 나이 50도 중반을 넘긴 내가.

   09:00 베가델발카르세를 떠난다. 눈이 내린다. 밤나무가 지천이다. 호두나무도 있다. 길에 떨어진 밤과 호두를 줍는다. 하염없는 눈이다. 산촌마을 돌담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돌담 위의 작은 꽃과 이끼는 이 마을의 큰 매력으로 보인다.(내 이번 카미노 중 잊지 못할 경치 제 일 번이 바로 이 이끼로 덮인 돌담길이다.)  

 마을 중간중간에 팔고자 내놓은 집들이 보인다. 2 년 전 남유럽의 경제 위기가 심각했을 때이기는 했으나, 바르셀로나 시내에 팔고자 내놓은 상가들이 도시 전체를 암울하게 보이게 하더니, 이 카미노 상에도 경제 위기의 한파가 비켜 지나갈 수는 없었겠지.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에 살던 가족들이 이 터전을 내놓고 어디로 가서 오손도손하던 이야기들을 이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짠해 온다.  마을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른다. 

  12:00 LA FABA 정상이다. 920m. 일본에 간 적은 없으나 일본을 좋아한다면서, 실내장식은 또 인도 문물로 가득 채운 주인장이 운영하는 간이음식점에서 간단한 베지테리언 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12:30 출발. 어제 한 한국인이 길을 잃었었다는 말을 들으며 출발한다. 성당도 눈 속에 희뿌였다. 우리도 곧 눈과 하나가 된다.


  계속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오른다. 한 치 앞이 안 보여 서로 안부를 자주 확인하며 오른다. 나를 걱정해 주는 이 두 젊은이들이 더없이 고맙다. 가족도 이러한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고마운 존재. 

  20Cm 이상이 쌓인 눈길을 걷는다.

  오세브레이오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다. 내리던 눈이 그친다. 한참을 가니 또 눈이 내린다. 망망무제란 이런 것인가?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여기서 다치면 큰일이다. 우리 셋은 서로 안 보이면 걱정해 주고 기다려 준다. 아무 생각이 없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 외에는.

  포근한 일상을 두고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 연옥을 면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본다. 넉넉하지 않은 돈으로 주린 배 움켜잡고 걷는 이들은 더욱더. 

  산티아고가 속한 Galisia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온다.

  이탈리아 청년 졸루카와 나는 감격하여 사진을 찍는다. 사실 나나 졸루카보다 더 감격해야 할 사람은 리포이다. 나와 졸루카는 레온에서 시작하여 오늘로 카미노 7일째. 리포는 파리에서 히치하이킹으로 프랑스 남부 생장으로 가서 거기서 카미노를 시작하여 약 한 달 만에 산티아고가 속한 Galisia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Galisia라는 지명이 산티아고가 속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다시 정상에 섰다. 

  우리가 넘어온 산과 마을이 눈 아래 펼쳐진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오세브레이오 이후에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우리를 위하여 작은 경적을 울려 준다. 고맙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나는 산티아고에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다. 

  두 시간이 지나 내가 가진 안내 책자에도 소개되어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졸루카는 이탈리아에서 대학을 나온 후 이곳 스페인에서 1년 간 철학을 공부했다더니, 스페인어가 가능하여 지나는 사람들에게 알베르게 정보와 도로에 대한 정보를 얻어 준다. 리포와 둘이 다닐 때에 비하면 좋아진 점이 많다. 고맙다. 

  Albergue del Puerto에 도착한다. 방명록에서 한국인 순례자 마이너스손이 다녀갔음을 확인한다. 이 알베르게가 괜찮다는 내용과 함께. 방들이 자그마하다. 두 남자는 한 방에. 나는 1인 침대가 있는 독방이다. 야호! 카미노 시작 후 두 번째 독방. 이렇게 행복할 수가. 샤워실에 들어가니 욕조도 있다. 다리가 아플 때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욕조인가? 샤워기 꼭지는 깨져 있지만 욕조가 있다는 것은 내 카미노 상에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욕조 마개가 없다.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양말로 욕조 배수 구멍을 틀어막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몸을 더운물에 담근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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