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카미노 중에 느낀 최고의 추위와 피곤함 속에서 잠을 청하다.
2월 16일 일요일. 카미노 제6일.
카카벨로스에서 베가델발카르세까지 23.7Km.
나의 세컨드 하우스가 있는 영월로 가는 주천강길과 유사한 길을 따라 걷는다. 페레헤 강이 계속 내 발길을 인도한다. 지나온 여정에 비하면 단순한 길이다. 일요일이지만 차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사이클 족들과 햇볕을 즐기는 노부부가 가끔 지나갈 뿐이다.
단순한 여정은 나를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엄마를 위해 걷는다. 오로지 자기만 아는 한국의 평범한 남편에게 받은 크고 작은 상처와, 함께하고 싶지만 자기네 일만 소중하다 여기는 자식들 때문에 받은 상처 때문에, 막연히 그리워하고 또 걸어보고 싶었던 이 산티아고 길을.
내 엄마를 위해 걷는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설움을 명문대 입학한 자녀로 한 번은 보상받는 듯했으나 당신이 흡족히 여길 만큼 살아 주지 않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던 내 엄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지금의 상태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과 밤을 괴로워하셨을까.
내 남편을 위해 걷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는 아내, 자신만을 위해 살아주지 않아 언제나 2% 부족한 생을 살아가고 있는 내 남편을 위해 걷는다.
죽은 노 대통령을 위하여 걷는다. 권좌에 있을 때나 권좌에서 내려왔을 때나 그 지긋지긋한 거대자본과 거대언론에게 멸시당하고 숨조차 쉴 수 없어, 한 몸뚱아리 바위 아래 던져서라도 치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을 위해 걷는다. 노대통령의 영혼이 잠시라도 이 산티아고 길에서 안식을 얻기를.
목적지를 한두 시간 앞두고 오바마 대통령의 얼굴빛을 가진 씩씩한 독일인을 만난다. 거대한 몸집을 가졌으나 유난히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다. 배낭도 작고, 신발도 운동화에 청바지. 우리나라에서 카미노를 나서는 사람에 비하면 장비가 상당히 어설퍼 보인다. 만나자마자 여기를 왜 왔는지 묻고, 또 자기는 11월부터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도 쉽게 해 준다. 카미노 상에 있는 사람들은 금방 만나도 이렇듯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것처럼 쉽게 속을 보여 준다. 나와 리포는 먹을 수 있는 물일까 확신이 서지 않는 물 호스를, 그는 과감하게 끌어다 자기 물통에 물을 채우더니 곧 키 작은 우리 동양인을 추월해 간다. 바이바이. 부엔 카미노. 그러나 그가 묵으려던 알베르게가 닫혀 있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그를 다시 만나 같은 알베르게에 든다.
오늘밤 묵을 침대를 정한 그 독일청년은 차근차근 사물을 꺼내 놓으며 OK, OK, OK를 연발하면서 한 가지씩 사물을, 겨울철이라 순례자가 적어 비어 있는 침대 2층에 정리한다. 2층 침대가 여럿 놓인 알베르게에서 여러 명 함께 숙박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OK의 의미를. 내일 아침 떠날 때까지 타인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며 필요한 사물을 한 가지 한 가지 소리 내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을 때의 발성임을. 사물을 다 정리한 키가 큰 그는 2층 침대의 1층에 불편한 자세로 앉더니 기도서를 꺼내어 성호를 긋고 기도를 시작한다. 충만한 표정이다. 약 한 시간 같이 걸어오는 동안, 그는 이번 카미노의 이유를 직장과 관련된 이유,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이 알베르게는 유난히 춥다. 오늘 카미노가 힘들었는지 손을 뻗으면 내 배낭이 있고, 그 배낭 속에 발열시트가 있는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을 정도의 피곤이 몰려온다. 그냥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