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지음)
37년간의 단독주택 생활을 청산하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물건일지라도 재사용의 관점에서 처리하는 노력을 기록하고 싶어서 『그래도 제대로 1화』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이후 책을 읽으면서, 주말농장 일을 하면서, 여행을 하면서, 영화를 보면서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을 『그래도 제대로』 시리즈로 브런치에 연재한 글이 20화에 이르렀다.
비정기적이고 주제가 정해져 있지도 않고, 함량 미달인 글임에도 많은 브런치 작가님들이 읽어 주시고, 라이킷해 주시고, 구독해 주시고, 소중한 댓글로 위로와 용기를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서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부터는 그동안 읽은 책들, 새로 읽어갈 책들 중에서 망각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책에 반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중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는 책이거나,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책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나의 관점에서 한번 다시 상기하고 싶은 지점을 소개하려 한다. 처음으로 가져온 책은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메시지뿐만 아니라 놓치기 아까운 명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는데, 오늘은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방금 죽은 자신의 뼈 365마디와 뱃속 장기를 눈으로 손으로 직접 보고 만지고 계량함으로써, 참 의원의 단계로 올라가라는 스승의 유지를 받드는 장면이다.
이는 의원이 된 자의 본분이요 열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아니리. 하나 나 또한 내 몸속에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사람의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 다섯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피어 그로써 네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 (소설 동의보감 중, 277쪽)
허준은 보고 있었다.
유의태의 시체에서 체온이 사라지고 사후경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위의 책 중 278쪽)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비록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기를 열망하오나 그렇기로 어찌 스승님의 몸을 갈가리 칼질을 하오리까. 난 못하오.”
“해야 하리!”
“……” (위의 책 중 279쪽)
“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대가 사모하던 스승 유의태의 몸을 가르는 것이 아니요, 이 사람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여겨야 하리.”
허준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갔다. 눈앞에 유의태의 백랍처럼 창백한 사체가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말을 걸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 모든 병든 이들을 대신한 죽음……’
“칼을 잡게.”
허준이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하오리다.”
“마음을 먹게.”
“칼을 드는 것은 사람의 몸속 생김새를 알고 그 속에 찾아드는 어떤 작은 병도 낫우리라는 결심이노라.”
“명심하오리다.” (위의 책 중 281쪽)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지혈이 된 스승의 손을 공손히 잡아 염원했다.
‘이 세상 병고에 시달리는 모든 이의 가슴에 스승님이 영원히 살길.’
……
‘스승님이 영원히 사는 길……’
바람 소리가 일고 있었다.
첫 햇살을 보고 울어대는지 뻐꾸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허준의 손이 마침내 스승 유의태의 옷자락 매듭을 하나둘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예도를 쥔 허준의 손끝은 이미 떨리지 않았다. (위의 책 중 283쪽)
얼음골에서의 사흘이 지나갔다.
……
“다 마쳤소?”
“……”
“……”
“마쳤사옵니다.”
김민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보았소?”
“……사람을 보았습니다.”
“……”
“겉으로만 보던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람이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애썼느니.”
김민세가 허준을 끌어안았다. 순간 허준이 유의태의 관 앞에 꿇어앉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
“……”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이 고마……움……맹세……코 영원히 잊지 않으……오리……다.”
말을 마친 허준이 이제야 유의태의 관을 잡고 몸부림쳐 통곡했다. (위의 책 중 284쪽)
소설 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이라는 조선의 대표 의서(醫書)를 지은 허준의 일대기가 소설 형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어느 부분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부터가 허구인지 모르나, 그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성(醫聖)이라 불리는 허준의 의학을 향한 열정, 사람에 대한 사랑을 20세기의 작가 이은성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써내려 갔다는 사실, 미완의 유고가 한 출판사에 의해 상중하 세 권으로 출간되어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 책의 서설(序說)을 소개한다.
16세기말!
조선왕조 중엽의 두터운 신분차별 속에서 천첩의 자식이라는 미천한 출신으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양평군(陽平君)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던 인물! 무덤 속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고 이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사랑했던 사나이!
한방의 종주국으로 자처했던 중국에게까지 하늘의 손을 대신한 신인(神人)으로 숭상받던,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이 소설은 그 불꽃보다 뜨거운 생애를 살다 간 허준의 일대기다. (위의 책 상 6쪽)
2025.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