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십사 메가헤르츠 Sep 28. 2024

인종차별?! 인생의 쓴맛을 보다

소셜스킬이 +1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해외에 살면 인종차별 안 당해?



라는 질문이 무색하게도 난 한 번도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없었다.


바로 이 날이 오기 전까지는...





적은 머리숱에 오래도록 감지 않아 뭉친 머리, 겹겹이 덧대입은 옷들, 낡은 짐가방 3개. 한동안 씻지 않아서 나는 냄새. ‘노숙자인가? 뭐 할머니니까 씻기 힘드셔서 그럴 수도 있지.‘ 


손에 잔뜩 움켜쥔 채 계산대로 들고 온 물건 5개.

그중에 2개를 내 앞에 두고, 3개를 자기 앞에 내려놨다. 나는 내 앞의 제품 2개를 들고 ’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물었고, 계산까지 마친 뒤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을 가로채며 가방 안에 넣은 2개를 빼고, 나머지 4개의 제품을 담는 것이 아닌가?!

"고객님이 이것을 계산하셨는데요?"라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과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사겠다고 했어! You can’t speak English obviously!" (너는 영어를 못하는 것이 분명해!)‘


‘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계산할 때 이것을 사시겠냐고 확인했고, 계산까지 마쳤는데 아니라고?!

그녀는 나를 헷갈리게 하려는 듯 제품들을 가방에 넣었다 뺏다 하며 이것, 저것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그럼 이 제품 3개로 바꾸시겠어요?”

라고 묻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영어 못하네.”


'지금 영어로 대화하고 있는데 무슨 말하는 거야? 인종차별이야?! 그냥 확 싸울까?' 생각하며 큰 소리 내고 싶었지만 일단 그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제품에 대한 응대만 했다. 나는 이 사람의 행동이 '이런 식으로 매장 직원들을 감정적으로 건드리고, 계산을 바꿔가며 헷갈리게 해서 물건을 그냥 가져가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계산에 신경 썼다.


계산했던 2개의 제품을 마이너스로 찍은 후 다른 3개의 차액을 계산하려 했더니 그녀가 또 말했다.

"너 아까 2개 계산했잖아, 여기 영수증 있는데 왜 돈을 또 내라고 해?"

"(낚이면 안 돼. 침착하자.) 그 2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만 계산했습니다. 여기 확인해 보시겠어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 머릿속은 혼돈의 카오스였다. 똑바로 정신 차리려는 노력과 바로 받아쳐야 하는 영어, 당황스러움, 나쁜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정심 지키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저 빨리 그녀를 내보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끝까지 흥분하지 않고, 또박또박 응대하자 대충 얼버무리며 매장을 나갔다. 이번에는 현금으로 환불하겠다며 다시 올까 싶어 지켜봤더니 이 매장 저 매장을 다 돌아다니는 듯했다.


폭풍이 지나가고 매장이 조용해지자 깊은 한숨이 퍼져 나왔다.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크게 화내지 않으면,
저 사람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계속 무시하고, 인종차별할까?
화내고 같이 흥분하면,
일이 커져 문제가 생겼을까?'



며칠 전 아들에 대해 강의하시는 최민준 강사님의 영상을 본 기억이 났다.

"아들이 맞고 오면 속상하시죠?
아들이 맞고 들어오면 엄마 생각보다 본인을 더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돼요. 거기서 "너도 때려! 왜 맞았어!"라고 물어보면 아들은 그게 진짜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힘이 약해서 맞았어. 나는 용기도 없어.' 이렇게 가면 안 돼요.

이렇게 말씀해 주셔야 돼요."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은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누군가를 때리지 못하는 심성은 약점이 아니고 너의 가장 중요한 강점이야."

인간에게는 고유의 영역들이 있어요. 그걸 정체성이라고 불러요. 인종, 성별, 뿌리, 가족.. 그중 하나가 기질이에요. 누군가를 때리지 못하는 기질은 가르쳐서 변화되는 영역이 아니에요. 여기 계신 분들도 어렸을 때 한마디도 못했던 분들 계실 거예요. 지금 나는 곧잘 말해. 하는 분들은 그 결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의 기질을 조절할 수 있는 소셜스킬이 생긴 거예요.

그 아이도 평생 당하지 않을 거예요. 자기만에 소셜 스킬이 생겨서 멀리서 피하거나 선생님한테 얘기를 하는 등의 방법이 생길 거예요. 그러려면 그 아이가 자신, 자기 기질을 사랑하게 만들어 줘야 해요.

내향적인 아이가 소심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콤플렉스가 되고, 그 아이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서 발전을 더디게 만듭니다. 어떤 아이는 이 내향성을 신중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그게 보좌하는 날개가 되어서 그 아이의 평생 자산이 될 거예요.

내향적인 아이를 외향적인 아이로 바꾸거나 못 때리는 아이를 과감하게 때리는 아이로 바꾸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없어요. 갖고 있는 걸 사랑하게 돕는 걸 하셔야 돼요.
'너는 이 착한 마음 때문에 잘 될 거야. 네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바로 이거야. 그런데 그게 빛을 받으려면 보완해야 하는 점도 있어.'


맞았지만 때리지 못하는 아이 = 나의 기질


굳이 변명하자면,

자신의 나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표출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배려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이 본인의 나쁜 감정을 이유 없이 화로 표출하면 그 사람과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비스업으로 일하는 중이었으니 더 큰소리 내지 못한 것이다.


내 상황을 들은 친구는 큰 소리가 나더라도 강하게 말했어야 했다며 흥분했다. '이 나라에서 인종차별은 범죄니 경찰에 신고하겠다.'라며 보안요원이라도 당장 불렀어야 했다고.


외국에 살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또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니 나의 강점을 살린 현명한 소셜스킬을 장착해 봐야겠다.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 사람이 할 말 없게 만드는 '조용한 한 방'을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 지금 영어로 말하고 있잖아. 아니면 네가 한국어 할 줄 아는 거야? 나는 둘 다 할 줄 알아서 그래.”

“We are talking in English right now, right? Or do you speak Korean? It's because I can speak both.”


그날 나는 인생의 쓴 맛을 제대로 봤다.

런치타임에 집에서 가져온 삶은 삼겹살과 샐러드로 그 쓴맛을 꾹 꾹 눌러줬다. 후식으로 커피도 한잔 마셨고 말이다. 삼겹살 덕분인지 회복력이 좋아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그 안 좋았던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소셜스킬이 +1 업그레이드 됐다.






이전 12화 체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