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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외국 스타일이야!

1화. 웃지 마, 나 진지해



나 유럽으로 배낭여행 갈 거야!



가족들이 모두 모인 저녁시간, 뜬금없는 고백을 했다.

"뭐?", "어딜 간다고?", "누구랑? 혼자?!", "언제?", "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질문 폭격이 시작됐다. 훗,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백 번 이길 수 있지!

“다음 달. 나 혼자. 유럽으로. 배낭여행 다녀온다고. 가고 싶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못 갈 것 같으니까!”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가족이니까 출발 전에는 알려야지!




혼자 한국밖을 나가겠다고 다짐한 22살.

언어적으로나 자본적으로나 믿을 만한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나가겠다고 당돌하게 큰소리쳤다. 부모님은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쓰시다 아무래도 못 믿어우셨는지 보호자로 언니를 같이 보내겠다고 선언하셨다.

"왜? 싫어! 나는 지금까지 아르바이트하며 돈 모았단 말이야! 쟤는 돈 안 모았잖아!" (화가 날 때는 '언니'라고 부르기 싫어 '쟤'라고 했다가 더 혼나던 그때)

싫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동안 유럽을 상상하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온 나로서는 화산의 용암이 끓어오르듯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이었다.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직스럽지 못한 보호자는 '보호'를 핑계로 무료 비행기 티켓을 얻었다. 인생 참 불공평하다.


막무가내로 떠난 첫 여행 치고, 다행히 별일 없이 다녀왔다. 실수인지 잘못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그 넓은 세상이 마냥 신기해 하루하루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날을 시작으로 해외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됐고 틈만 나면 그 맛을 다시 보기 위해 여행계획을 세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학 졸업 후 조교를 맡게 되면서 매년 졸업여행을 함께 가게 됐다. 교수님과 학생들의 통솔 보조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호자 역할이었던 셈이다.


다양한 이유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호주 등... 10여 개국의 도시들을 다니며 나는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했다. 어딜 가도 입맛에 잘 맞는 음식들 때문이었을까. 관광지만 다니며 통했던 짧은 영어 때문이었을까. 편협적인 생각과 단순한 결론이 겹쳐지면서 이런 결론이 났다.



캬! 나는 외국에서 살아도 잘 살겠는데?
역시 난 외국 스타일이야!






그렇게 짧은 생각을 주머니에 넣은 체 해외를 다니던 사이, 시간이 흘러 30대가 됐다.

결혼을 하고 귀여운 딸 하나 낳아 알콩달콩 살고 있었더랬다. 내 인생은 멋지고, 아름다운 미래로 향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우리 외국으로 나가는 거 어때.?


남편과 즐거운 저녁시간, 그는 나에게 뜬금없는 고백을 했다.

데자뷔(Deja vu/ 처음 겪는 일인데도 마치 이전에 한 번 겪어본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질문 폭격을 남편에게 마구 던지고 있었다.

"뭐? ", "외국?", 어디?", "나도?", "언제?"


그런데...
도대체...
왜...???


식탁 위에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맛있게 먹던 음식 맛이 사라졌다.

'여행이 아니라, 아예 나가서 살자고? 아이까지 낳아서 이제 엄마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지... 지금... 도대체... 왜?'

여행 맛만 살짝 본 나와 달리 외국에서 생활해 본 남편은 다시 나가서 살고 싶어 했다.

사실 남편은 결혼 후 나에게 몇 번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을 안 했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끝이 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돌고 돌아 다람쥐 쳇바퀴처럼 또다시 돌아온 것이다. 더 커지고 커져서.


'그래...?! 그러면 더 늦기 전에 나갔다가 빨리 돌아오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난 외국 스타일이라고 큰소리치며 살았는데 진짜 해외로 나가서 산다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 내가?

하늘까지 치솟아있던 자신감이 막상 해외로 나간다고 하니 순식간에 바닥끝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나 어떡해...?

웃지 마. 나 진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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