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살면 꼭 겪게 되는 자신 없는 일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친 할머님의 부고였다. 남편은 태어났을 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그가 어릴 적부터 말 안 듣는 사춘기 시절, 군 시절, 나와 결혼하는 그때까지 모든 것을 곁에서 함께 지켜봐 주셨다.
결혼 전 병원에 누워계시는 할아버님께 인사를 갔다. 할아버님은 누워계셨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실 수도 없으셨지만 '결혼할 사람'이라는 손자의 말에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느낌은 너무 따뜻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3번의 인사를 드리고 결혼식을 올린 그 해 이별이 찾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슬픔에 잠긴 가족들의 손을 잡아드리는 것뿐이었다. 할아버님이 내게 해주셨던 것처럼.
그로부터 9년 후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우린 이미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고, 딱히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장례식장에 가 계신 친척어르신들과 사촌들의 손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 너무 공허하고, 허무했다. 침묵과 눈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며칠 동안은 큰 소리로 웃지도 않고, 별 대화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조용히.
첫째를 임신하고 조심스러웠을 무렵, 할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아기가 생기면 알아서 잘 자라니 걱정하지 말고 지내렴.' 할머님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지혜와 인생의 수많은 경험이 묻어있었다. 걱정 많은 나에게 든든한 지원군이셨다.
아이가 태어나서도 자주 웃어주시고, 참 예뻐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첫째는 인절미를 좋아하시던 할머님의 입맛을 그대로 닮았다.
몇 해가 흐른 며칠 전, 외할머님의 부고를 들었다. 친 할머님의 소식을 들었던 그날처럼 마음이 너무 무거웠지만 이곳, 이 자리에서 역시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마 해외에 살고 있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정말 자신 없는 일. 그래서 이민자들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그들만의 감정을 공유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잦아질 현실 앞에, 두 번의 침묵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보다 마음이 더 무거울 남편에게 괜찮냐는 질문 말고는 제대로 된 위로도 찾지 못했다.
가족의 이별 앞에서 어떻게 현명해질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안정과 위로의 경계를 조금 더 넓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