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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Sep 06. 2023

박사님, 깊은 공감이 뭔가요?

별난 사람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로 방에서만 지내는 금쪽이 사연을 보았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 어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무던히 애쓰는 아빠는 ‘~ 해볼래?’, ‘~은 어때?’ 자주 제안을 한다. 아빠만큼이나 착한 아이는 지금은 힘들지만 알겠다는 대답을 반복한다. VCR이 끝나고 오은영 박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몰라서 하지 않는 게 아니고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건 이해가 아닌 깊은 공감이라고 말이다. 친한 언니의 썸 이야기를 듣는다. 나와 동갑이라는 썸남에게 언니는 애정과 연민으로 자꾸 조언을 하게 된단다. 보통의 사람보다 훨씬 섬세한 언니가 그 말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했을지, 게다가 이성적 호감 때문에 곱절은 더 복잡했을 걸 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표현으로 말한다. “여자친구 전에 엄마가 되겠는 걸?” “근데 오은영 박사님이 그러시더라. 너무 힘든 상대에게 필요한 건 조언이 아니라, 깊은 공감이래.” 그리고 궁금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근데 언니, 깊은 공감이 뭘까?”


깊은 공감. 오랜만에 드는 공백이었다. 점심시간 말고 엉덩이 한 번 뜰 새 없이 바쁘던 날, 퇴근 두 시간이 남은 무렵에야 양치질하러 갈 시간이 생겼다. 칫솔을 들고 나는 친구에게로 갔다. 정신없는 하루였다며 대화의 물꼬를 트고 주말엔 뭐했는지로 이어간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때 친구가 한마디 한다. “너 이제 눈 떴다” 의자에 앉은 모양 그대로 찌그러지 듯 굽은 척추와 거북목으로 있다가 친구와 몇 마디를 나누고 돌아가는 순간에 얼굴이 반짝해졌다. 그날 밤, 썸을 이야기하던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타로를 봤는데 귀신이란다. 내용을 보니 웃고 떠들며 내었던 우리들의 소결이 타로 결과지에 그대로 쓰여있다. 이 정도면 최소 대화에 잠시 왔다간 사람이라며 놀라움의 키키키를 반복한다. 깊은 공감이 교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가끔 '나'라는 정의에 나 말고 다른 존재도 있는 날이 있다. 감정이입이란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분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날은 흔치 않고, 에너지 소모도 크다. 대화를 시작했다면 6시간, 8시간도 계속되는 일이라 일 년에 많아야 서 너 차례 정도로 횟수 제한을 둬야 한다. 상대 역시 같은 마음이란 것도 안다. 어쨌든 감정 교류가 넘치는 그 순간을 시작하면 무료하고 무심한 마음에 빛이 달라진다. 피곤에 지쳐 저녁 8시에 밥도 대충 먹고 잔다고 누웠다가 친구와 밤 11시까지 통화가 이어지던 날도 그랬다. 분명 눈이 따가울 만큼 피곤했는데 대화하다가 온몸의 피로가 풀린 날. 대화를 했으니 지쳐야 하는데 얼굴에 더 생기가 생기던 날 있지 않나. 두 명의 개체가 무슨 말을 그리도 길게 했는지 모른다. 곱씹고 곱씹어 다져진 연애사일지, 얼굴도 모르는 남의 상사일인지 중요하지 않다. 내용마저 형식일 뿐 우리의 밤과 낮에 대해 말한다. 나와 10km 떨어진 육체는 오늘 뭘 하셨는지, 나와 200km 떨어진 육체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를 그리고 당신의 작은 체구 ver. 은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한다. 대화에서 교감은 기분전환을 만든다. 노란 형광펜과 별표로 기록된 일기장에 따르면 그러하다. 이런 순간들은 대단한 프로젝트를 끝낸 날의 성취감이나 등기를 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와 같은 일생일대의 우연이 아니면서도 극적인 반전이 있다.


“언니 타로 그만 봐, 나 이제 자야 해” 잠을 자는 건 상수동에 육체이고 타로를 그만 볼 건 부천에 존재다. 이 이상한 말이 이상한 줄도 모르고 알겠다는 대답으로 돌아온다. 지난 일요일에 언니의 표정이 떠오른다. 늦은 오후까지 휴일 근무하면서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다던 언니는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 8시가 다되어 면 한 그릇을 하고 소화를 핑계로 30분을 더 걷다 헤어졌다. 타로 이야기를 하는데 언니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음을 느낀다. 생각을 하는 동시에 언니는, 아니 부천의 분신은 “깊은 교감이란 이런 건가 봐”라며 지난 일요일 즐거웠다고 한다. 깊은 교감. 그것달리기처럼 2시간을 전신에 땀이 나고 사흘 간은 묵직한 근육통이 생기는 인과가 분명한 대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내가 아는 정도는 깊은 교감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고, 피로회복제와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과 깊은 공감이 이해와 설명이 아니라고 말했던 박사님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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