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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Sep 07. 2023

말습관

별난 사람

'아니요'라는 말을 싫어한다. 기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도 전에 아니라는 말부터 하는 사람이면 미안하지만, 정이 털린다. 말끝마다 일단 아니라는 대답에 어떤 말을 덧붙이나 들어보는데 답이 글쎄라 거나 똑같은 추측에 지나지 않을 때, 그저 아니요병이 걸려버린 상대를 보며 왜 음성을 섞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우기는 이들은 많고 억지는 언제나 어렵다. 특히 내가 많이 좋아하는 너였을 땐 더욱 그랬다. 난 늘 아니라는 너를 논리로 보기 좋게 제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때마다 속으로 몇 번을 되물었는지 모른다. 상대를 갈아치울까 상황을 갈아치울까.


그러나 언제나 딱 하나가 문제였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너라는 그 사실이.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너의 말에 일일이 아닌 근거를 대야 하는 게 난 너무나 피곤했거니와 설명의 책임이 내게만 있는 게 버거워서 왜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줘야 하는지를 따졌다. 그런데 그건 아무 소용없었다. 너에게는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을 꼬집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또또 아니라고 한다” 그럼 너는 조금 뻘쭘해서 웃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조금 민망하대서 아니라고 말하고 보는 네가 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답답한 내가 바뀌는 것도 아녔다. 내가 널 좋아함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종국에는 헤어졌다. 너랑은 안 되겠다는 다른 말의 등장으로 말이다. 더 강한 문장들이 들고나며 그렇게 끝난 관계가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네 뒷모습과 닮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앞모습을 꼭 확인해 본다. 네가 아님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나이든 얼굴을 하고 있으면 돌아서면서 훗날의 네 모습을 빠르게 그린다. 호기심이 몹쓸 만큼 왕성하다. 네가 남긴 몇 개의 문장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매번 아니라 할 때마다, 반대로 자주 맞다고 우겨서 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설명의 의무가 남은 줄로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아니요병의 너와 맞다고 답하는 내가 몇 번 오가지 못하는 말싸움을 한다. 그러다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습관에 남으면 된다는 걸 말이다. 어떤 습관에 남는지에 따라 아주 고약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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