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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Sep 01. 2023

“언니, 봄여름이 갔는데 올해가 4개월 남았어”

금요일엔 다정한 게 좋아

자박자박 여름 내도록 신고 다닌 샌들. 어깨와 팔이 드러난 옷선 따라 그을린 몸에서 여름을 발견한다. 한 주 전만 해도 빗금 긋듯 죽죽 장맛비가 내렸고, 우산 아래에서 물 튕김을 피하며 야단을 떨었는데 말이다. 재밌게도 여름을 기억하는 건 가을이 와서다. 지하철 출입구를 나왔는데 바람이 시원하다. 얼굴 맞댄 콧김처럼 눅진하고 따뜻했던 바람이 어느새 시원해졌다. 에어컨바람이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계절 중에 두 계절이 지났는데 올해는 4개월이 남았다. 새삼스러워 소리 내어 말해본다. “봄, 여름이 지났는데 올해가 네 달 남았네.” 함께 걸어가던 친구가 “그렇네, 올해도 빨리 간다.”는 말을 한다. 올해도라지만 친구에게 올해가 예년과 같지 않을 걸 안다. 그녀의 뱃속에는 겨울과 함께 올 새 존재가 있다.


나는 가보지 못했고, 친구도 처음 가보는 길이라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 봄이었던 5월, 샌드위치 가게에서 샐러드를 시켜놓고 얼굴빛도 입맛도 그다지 좋지 않던 그녀에게 걱정 반으로 물었다가 임신이라는 설레는 답을 들었던 날. 진심으로 기뻐하던 순간을 시작으로 산모가 임신을 아는 주차는 일러도 5주 차라는 것, 입덧은 임신 초기부터 16주쯤 지속된다는 것, 초음파를 볼 때 태아의 활발한 움직임을 위해 병원에서도 초코우유를 권한다는 것이 그녀와 함께 이 주에 한 번, 일 주에 한 번 밥을 먹으면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 미스터리로 남는 것도 생겼다. 성별 따라 배가 나오는 모양이 정말 다른지, 체온이 오르는 이유가 균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그렇다면 체온을 올리면 건강해진다는 주장은 실제일지와 같은 거였다. 서로 안 지 햇수로 6년, 입사동기로 만나 좋아하는 책을 돌려 보고, 그러다 단둘이 밥을 먹을 때의 속도가 좋아서 주기적으로 밥을 먹었다. 생일을 깜박해서 결혼식날 수술을 하게 돼서 자꾸 미안해지는 일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다. 그러다 임신과 아기라는 주제로 다시 친밀해진다. 


마음을 쉽게 열고 쉽게 다가가는 나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아도 쉽게 닫지 않는 그녀가 엇갈리지 않은 건 신기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같이 간 봄의 덕수궁, 여름의 덕수궁, 서촌 편집샵, 남산둘레길과 전시회. 우리가 나눴던 것들엔 좋은 공간이 많았다. 천세련, 최은영, 은희경, 양경자, 구병모 함께 나눈 것 중엔 좋은 이들이 정말 많았다. 견과류, 쿠키, 파운드케이크, 레몬마들렌, 초콜릿 오고 가는 책상 간식들은 크고 작은 실수를 까먹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을지로입구역 10-3, 양치 타임, 번개 점약 그때그때 맞아떨어진 우연이 고맙다. 기회다 싶어 묻고 이때다 싶어 화답하며 쌓인 시간은 어느 날을 지나서 회사 동료만으로는 설명하기 싫은 사이가 되었다. 


어느 퇴사자가 SNS에 “당신들 때문에 회사 더 오래 다녀버렸다.”며 아쉬운 화풀이를 올렸던 걸 기억한다. 덕분에가 아니라 누군가를 탓하는 뉘앙스인 ‘때문에'에서 가까운 사이만이 할 수 있는 칭얼거림과 진심을 읽었다. 12월에 언니가 휴직에 들어가면, 나는 잘 다녀오란 말로 곱게 보내주진 못할 거다. 아니, 안할 거다. 봄이 오면 그 누구보다 먼저 놀러 오라고 초대하지 않으면 서운할 거라고, 사촌언니 아기에게 이유식을 20분 만에 다 먹인 이야기, 어릴 적 동생 기저귀를 갈아준 이야기를 괜히 흘린 게 아니라며 언니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는 편지를 들려 보낼 거다. 겨울초입을 맞이할 때까지 남은 몇 개월, 언니와 가을 덕수궁도 가야겠다. 언니와 함께라면 무료입장이니 한 번 말고 여러 번 가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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