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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Sep 13. 2023

짜증 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적절하게 잘 내고

대화의 단서

오늘 친구 J를 떠올린 건 찰나의 문장 때문이었다. 짜증을 내도 되는 건 아니지만 요즘 짜증을 참 적절한 방법으로 잘 낸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J가 사귀던 친구로부터 화를 참 적당히 잘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던 장면이 스쳤다. '적절한'이 매개였는지 화와 짜증의 유사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순간 그녀가 스쳤다.      

친구 J와는 대학교 때 만났고 지금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 일 년에 한두 번 주고받는 연락이 전부지만, 한때는 몸에 있긴 한지 닮으면 비슷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뇌골수 99%의 천생연분으로 저장해 두며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붙들어 두고 싶었던, 너무나도 닮고 싶었던 친구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야 다양하지만 J가 좋았던 이유는 조금 달랐다.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 내게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동시에 나를 한계 짓게 만든 존재였기 때문이다.


J는 똑똑했다. 과 동기 중에 성적이 가장 좋았다는 사실로는 부족하다. J는 특유의 자신감이 있었다. 수준 높은 리포트로 정원미달이 일쑤라 본과생도 절레절레한다는 강의도 들을 땐 토하겠다면서 재밌다고 내리 두 번을 들었다. 같은 학점이 같은 게 아니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애들이 모인 과답게 J와 종종 언쟁을 벌였는데 하루는 사람은 화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J와 화는 내지 않는 게 좋다는 입장으로 새벽 3시까지 설전을 벌였다. 언뜻 유리한 주장은 나인 것 같았다. 3초만 생각해 봐도 화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있는지. 없다. 화내는 건 볼썽사납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삼자의 이목을 끌만큼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J는 어째서인지 화는 필요하다고 심지어 건전한 거라고 말했다. J에겐 이런 생각들이 번뜩거렸다.


무려 10년 전부터 워라밸과 워케이션을 설파하고 타인에 대한 칭찬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J는 스스로는 모르는 장점을 콕콕 집어 나를 가치롭게 했다. 고등학교에서 인지감수성이란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 감정에서 더없이 똑똑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대학교 4학년 때 이것 말고는 할 게 없다며 빅데이터 포스터를 들고 와서 대학원을 간다며 준비할 때 나는 그녀만큼 학구적이진 않다는 이유로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친구를 기준으로 나는 못한다며 이상하게 빗겨 났다. 그러다가 오늘 J와의 일들을 추억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나는 방식이 달랐을 텐데 왜 아니라고 했을까.’ 자책도 후회도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렇다. 반문이었다. 그 물음에 또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고 가지 단어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어느새 A4용지 세 장을 채웠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 안의 우상이 10년 만에 무너졌다.


나는 J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질문자였고 J는 답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거니 받거니가 아닌 묻고 답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J를 좋아하기로 내가 대학을 다닌 4년 동안 얻은 것 중에 그 친구보다 값진 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좋아라하던 J를 피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불평등이 불편해서였다. J의 특별함이 나를 평범하게 보이게 하는 게 싫었다.


짜증을 내도 되는 건 아니지만 적절하게 짜증을 잘 내는 것 같다는 문장은 희한하게도 J에게 하는 뒤늦은 대꾸가 되었다. 이젠 나도 타인의 말에 기대지 않을 만큼 스스로에 대한 짬이 생겼다.


J에게 느낀 불편함이 내게 처음 있는 우상이란 걸 몰라서였듯이, 이후 우리의 10년이 이렇게 가버릴 줄 몰랐듯이, 앞으로의 우리가 어떨지 또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내게 생긴 여유만큼 우리 사이에 좋은 것들이 들어올 틈이 넓어졌다고 말이다. 올 연말에도 우린 줌으로 만나겠지. 그때 나는 빨개지는 얼굴로 말하겠지. 나는 너가 좋았다가 미웠다가 부러웠다 너는 내 우상이었다고. 그걸 지금 알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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