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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Oct 24. 2023

다정하러 가는 길

적당히 지겨워졌다. 내게 지겨움은 무료함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었다. 심심하다에서 그치지 않고 그 상태가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하루에 1분 1초 이런 순간이 있는 건 호사스러울지 몰라도 당면한 순간만큼은 미간 사이가 찌푸려지며 “아씨”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뱉어졌다. 누군가의 몸, 누군가의 결혼 생활, 누군가의 다툼. 누군가들의 사사로운 이야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읽어낼 것이 없는 단신 기사가 안 궁금하지 않고 기사를 딸깍딸깍 겁 없이 덜컥 덜컥 누르다가 허탈해지는 반복에 또 지겨워지고 말았다. 겨우 오후 두 시였고 햇살이 벽면 한편에 드리워졌다.


오랜만에 글을 쓰면 어떤 말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문단을 연달아 써낼 만큼 농축된 말은 없었다. 농축된 이야기란 표현이 진부해서 아무렇게나 표현하고 싶진 않단 생각만 들었다. 매일 돌아가는 집도 새로운 골목으로 걸어갈 때 조금 신나는 것처럼 재미를 꾸며내고 싶었다. 마음도 바꿔보고 싶었다. 노력이 익숙한 사람인 나에게 매일 쓰게 하는 힘보다 멈췄다 다시 쓰게 하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오늘은 재밌게도 짜증이었다. 일이십 분 전에 ‘아씨’로 시작과 동시에 끝난 그 짜증 말이다. 


컵라면 하나 익을 시간에 마음이 변했다. 온탕과 냉탕만큼이나 짜증과 흥미 사이에 차이는 분명했다. 추측하고 싶었다. 이번엔 짜증이었는데 다음엔 어떤 이유로 다시 쓰게 될지, 얼마나 걸릴지에 대해서 말이다. 다음번도 짜증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생길까, 이런저런 감정의 농단에 쓰게 된다면 이후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 같다. 쓰고 싶어서 쓸 뿐이구나. 


모든 게 별로라는 말로 답할 때가 있었다.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어, 내키지 않아, 별로야.’ 근데 심드렁함을 들키고 싶진 않다. 애써 아닌 척을 하려고 작은 것에도 큰 몸짓으로 반응했다. 그러다 안 그래도 된다는 듯 별로라는 마음을 무심히 넘어가는 너를 마주했다. 내가 아는 너는 나의 화남과 즐거움에서 화는 풀어주고 즐거움은 함께하려는 사람인데, 별로인 마음엔 모르쇠 하며 눈앞에 유청을 우유와 섞으며 불 앞에 서 있다. 정말 신기한 일이 다음에 이어졌다. 모든 게 별로던 마음이 그럴려니로 전환됐다. 냄비에 불이 났다 꺼진 것도 아니고, 스프링클러가 터져 물난리가 난 것도 아니고, 사소하게는 만들어지고 있는 리코타치즈가 입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저 유청과 우유를 저어가며 허리손을 한채 냄비를 응시하는 너를 보면서 마음이 돌아섰다. 무심한 너 앞에서 대놓고 심드렁해봤으니 더할 심드렁이 없다고 관념과 추상을 끝냈다. 그렇게 나는 앉은자리 식탁에서 턱 괸 손을 빼고 허리에 손을 갖다 댄다. 그럴려니로 넘어갔다.


시간 앞에서 다 기록하지 못할 작은 것들이 너무 많이, 빨리 지나간다. 카메라 렌즈에 한 컷 담고, '우와' 감탄사 한마디로 퉁치며 자연스러울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무엇에 얹혀 체기가 유발됐는지 도둑맞은 의식의 순간들에 몸서리칠 때도 있다. 곱씹어봤자 되새김질인데 나는 다시 꺼내보는 앨범의 즐거움과 무엇이 다른 되새김질인지 알지 못한다. 아직 이 질문에 끝점을 찍지 못했다. 어쭙잖기도 싫고, 이해 못 하기도 싫고. 아하, 나는 그럴려니로 한 발, 싫다로 한 발 이렇게 두 발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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