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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Nov 05. 2023

200일을 앞두고

서른에 하는 연애에도 200일이 찾아온다. 숫자 ‘1’이 들어간 백일, 일 년보다 덜 중해보이는 선입견 탓에 기념일로 챙기는 게 맞을까란 고민이 스윽 들자, 곁가지로 이 연애가 너여서 좋은 걸까란 생각도 들었다. 연이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연인을 보면서, 골목에서 포옹하는 커플을 보면서 나도 한때 저런 적이 있었다가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는데라는 마음이 커서 너를 떠올리는 건 아닌가. 몇 달 전부터 매주 봐도 편한 사이가 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 쓰기 시작했다.


닮아감. 하루 네 시간이면 많이 잤다며 불면증이 있던 내가 매일 열 시까지 자는 너를 따라잡기라도 하듯이 여섯 시면 떠지던 눈이 이제는 출근하려면 일어나야만 하는 시간까지 알림을 끄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나는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 내 불면증은 네가 고쳤다고 믿는다. 반면에 데이트를 하는 날 네 얼굴을 보며 인사하기 전에 먼저 배를 한번 쓱 만져보며 “배선생님, 오셨습니까?”라 한다. 네가 머쓱해해도, 이건 닮아갈 수 없다는 경계 짓기다. 너의 최애 메뉴인 순댓국집을 갔다가 짜다며 성질낸 뒤로, 너와 나는 순댓국집은 함께 가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고, 200일 가까이 브런치는 먹으러 다니면서 아직 곱창과 삼겹살은 같이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내가 유난이고, 네가 그 유난에 맞춰주고 있단 걸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라며 선택적 애정을 견지한다.


맞춤도 있다. 나는 고맙단 말을 잊지 않고 잘하듯이 화내는 것도 잊지 않고 잘한다. 때론 그 화를 이해할 수 없는 너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재부팅하고 온 로봇처럼 내가 미안해로 시작해서 싸움의 여지를 없앤다. 긴급히 사과해야 할 땐 힘겨워도 그 자리에서 화가 풀린 날 볼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화나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나는 다섯 번 중에 한두 번은 해볼 만하겠다 싶어 그렇게 하게 되었다. 너랑 나는 화 푸는 연습을 위해 화를 내보는 것처럼 실수를 하고 사과를 하고 화푸는 법을 서로에게 알려줬다. 밥 먹는 중에도 흘리면 식탁을 꼭 닦아야만 하거나 타인과 있을 때면 휴대폰을 하지 않는 다른 습관들은 재밌네라며 그럴려니 넘어가지는 점도 있었으니 애초에 너무 안 맞던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다.


같이 지내면서 좋은 감정은 늘고, 나쁜 감정은 줄어드는 날도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너는 싸운 뒤에 내가 먼저 손 내민 때나 안반데기의 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생경한 아름다움을 같이 하던 순간, 혹은 네가 만들어준 닭갈비에 수십 번을 감탄해도 질리지 않던 뿌듯함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도 그런 날이 좋았지만 꼽는다면 며칠 전 수건 개수 세던 날을 이야기할 거다. 출장을 다녀와 빈집이었는데 가득 채웠던 수건이 없던 날, 질문이 의심이 되었고 너는 내게 죽어라 의혹을 소명했던 날. 이해가 되자 나는 명료해졌고 너는 화가 났던 순간, 난 화난 너를 처음 봤는데 이상하게도 믿음이 생겼다. 너의 진심과 동시에 너의 화는 안전하다는 걸 보았으니깐.


너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서라면 신발을 숨기고 부엌 싱크대 아래서 몸을 쪼그리고 숨어 있을 수 있고, 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요리와 플레이팅 그리고 그 밑에 숨겨놓는 카드를 아무 날도 아닌 날에 준비할 수 있다. 각자 일하고 돌아온 저녁 식탁에 앉아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신혼부부 같다며 즐거워했던 날의 조도, 썼던 안경,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모닝빵의 개수를 기억할 수 있다. 내 몸과 마음이 너와 보내는 시간에 조금씩 더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말이다.


“네가 좀 더 좋아졌나 봐. 마음에는 변화 좀 생겼다고 괜히 불안하네” 나는 너 앞에서 솔직한 언어를 구사한다. 몇 번의 모습에서 알게 된 거다. 때때로 너는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수용한다는 걸 말이다. 생각에 있는 줄도 몰랐던 말이 나오면 나는 나 자신보다 너에게 더 솔직한 게 아닌가 헷갈린다. 부끄러움도 주저함도 없는 솔직함에 아무렴 신난다. 그런 날 보며 웃는 너를 보게되어 또 좋다. 다음 질문을 한다. 내가 얼마냐 좋냐고 묻자 너는 지금 뭐든 다 할 수 있을 만큼 좋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냉큼 우리가 갈 지하철에 먼저 다녀오랬더니 너는 나에게 ‘같이 가자’고 답한다. 뭐든 다할 수 있을 것 같단 너의 느낌은 느낌뿐이란 걸 알게 되지만 네 말은 참 미워할 수 없이 따뜻하다. 너도 우리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지금에 고맙다. 이런 날들이 200번째가 된다니 그렇다면 이건 기념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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