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단서
“작은 딸 최고다”, “작은 딸 왔으니깐” 작은 딸인 나에게 분명 듣기 좋은 말들. 그런데 이 말이 나의 언니와 동생 앞에서 시도 때도 없다면 이 말은 이내 칭찬이 아니게 된다.
우리 집은 딸 둘 아들 하나인 집이다. 친구 중에도 삼 남매인 집이 꽤 있고, 높은 확률로 막내가 아들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막내들이 어려서, 아들이란 이유로 귀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집은 조금 달랐다. 우리 집의 예쁨 기준은 성별이 아닌 아빠기준이었다. 학생이면 공부 잘하고, 사회인이면 취업 잘하는 게 기준이었다. 어쩌다 나는 혜택을 입은 자에 속했다.
삼 남매인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꽤나 친밀한 관계다. 물질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서로에게 필요한 걸 기꺼이 내어주는 편이다. 생일과 취업 등 기념일이나 입원 퇴원 같은 병간호뿐 아니라 집 근처 공항이어서, 회사 근처 서울역이라서, 면접이 끝나고 시간이 남아서, 해보니 좋은 것 같아서 많은 이유로 서로의 시간을 뺏고 뺏겨주는 관계다. “나 니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이라는 말로 갈취가 당연하지만 친구들에겐 “꽤 사이좋은 남매”로 자랑하는 사이들이다.
믈론 “싸울 땐 언제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좋아 죽는 사이이기도”하다. 그래서 난 내 동생의 앞날에 축하를 못할망정 걱정과 한숨을 쉰다면 그게 엄마 아빠라도 따지고 들었던 걸 거다. 내 언니에게 누가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그게 형부라 하더라도 그 앞에서 이를 갈고 눈을 흘기며 참지 않을 거다. 월급 전날을 놓치지 않고 카톡 할 거다. 5자리가 안 되는 잔고를 캡처하며 내일이면 못 드릴 전재산을 내어드리겠다며 액수보다 큰 사랑을 전송한다고 말이다.
내가 언니와 동생을 사랑하는 이유는 많다. 그들은 나를 선하게 만든다. 그들의 좋은 일에 축하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고, 그들의 아픈 일엔 덜 아프게 하기 위해서 내 머릿속은 온갖 짱구를 굴린다. 그 생각들은 온전히 그들을 위한 공헌의 시간인데 그것들이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 그들의 존재는 이렇게도 특별하다.
그래서 부모님의 편애에 꼭 한마디를 해야겠다. 백 번이고 의도하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 무심한 칭찬이 우리 셋의 관계를 달갑지 않게 한다고 말이다. 나를 위한 말이 그들과 비교라면 차라리 말아주시기를. 그들과 가르는 말로 내게 그들을 멀어지게 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우리를 정말 좋아한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 주는 정성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애는 무늬만 칭찬일 뿐입니다.
편애가 민감한 데에는 나 역시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해서였다. 그때 내가 느낀 반감의 대상은 칭찬하는 사람의 의도였다. 칭찬을 받고 즐겁기만 할 땐 몰랐다. 편애하는 사람의 말에 따라야만 인정과 예쁨을 누린다는 걸 말이다. 언젠가 내가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경제적 정서적 지원이 끊겼는데 카톡 읽씹과 전화거절이 심리적 단절로 얼마나 아프고 두렵기까지 했는지 아직 기억한다.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이란 말, 절대적인 울타리가 실은 시비(是非)가 붙은 사랑이었다고 혹은 나는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라 ‘자랑’이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게 정말 아팠다.
지속되고 점점 깊어지는 관계, 가족. 이 관계는 결코 쉽지 않다. 마음에 풀리지 못한 응어리도 있고, 연민과 좋았던 감정 등 너무나 많은 장면이 있는데 다섯 명의 가족 모두가 네 명의 상대에게 또 그만큼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 관계의 복잡성엔 명확한 거라곤 없다. 그래서 나는 어렵고 불편해도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자주보지 말자로 끝난 지난 끝인사가 싫고, 이상(理想)적인 이상(異常)한 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심술 하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서부터 말을 해가야 할지 무방비가 되어버렸지만 나와 부, 나와 모, 나와 언니, 나와 동생 난이도 최상, 중, 상, 하 사이에서의 문제를 마주해 보기로 한다. 그래서 오늘 이건 첫 주문이다. 우리 사이를 편애 마세요. 받는 우리는 불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