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다가 멋진 척으로 우회했을 때
대화의 단서
간밤에 뻥을 제대로 쳤다. 소재는 흔한 사랑싸움이다. 근무환경이 바뀐 뒤로 표현이 줄어드는 남자친구에게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해오던 나는 어제도 한마디 했다. 물론 나만해도 업무처리 속도가 평소보다 미진할 때면 카톡이고 메신저고 쳐다보지 않고 일이 끝날 때까지 일만 한다. 게다가 회사에서 나빴던 일을 서로 공유한 적은 한 번도 없기에 새 환경이 그를 얼마나 피로하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난 그에게서 “오늘도 진짜 바빴어”라는 말을 들었고 그게 불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보며 마음이 닫혔다고 해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에 나한테 외할머니 얘기하던 거 기억나? 그때 스스로 그런 말을 다 한다며 되게 신기해 했었잖아. 그때 너 정말 편해 보였는데” 이런 세 네 문장으로 동굴에 들어간 그가 단박에 풀어져 나올 리가 없었다. “요즘 들어서 애정 표현이 많아진 내가 너보고 표현이 적다고 할 때 혹시 억울할까?” “퇴근 후에 연락없다가 잠들기 전에 연락하는 내가 너에게 신경 좀 쓰라고 하면 좀 서운했겠다” 그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스친다. 고민이 많았네라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을 하는 널보며 나쁜 말은 되도록 덮어두는 넌 그러지 않는 나를 보며 기분이 상한 때가 있었구나 싶었다.
여기까지가 이해한 부분이었다. 나는 그의 동굴행에는 바뀐 상황과 함께 나와 불편했던 몇 번의 경험이 쌓였겠다 싶었다. 종종 재발방지를 위해 싸움의 정확한 이유를 찾고자 했던 나는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정말 오랜만에 속이야기를 했던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T야?”라는 말도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봤던 것도 미안해진다.
그 미안함에 나는 한발 더 나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에게 사소하더라도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했다. 입력값이 꽤나 정확한 그는 오늘 “조금 전에도 아주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순간 난 ‘아차!’ 했다. 유독 부정적인 감정에 취약한 나란 사람은 밤 어두운 골목에서 사람들이 조금만 큰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싸우는 게 아닐까 봐 놀라곤 한다. 힘든 일을 다 받아줄 것처럼 해놓고, 해결방법도 직접 제시해 놓고 맞닥뜨리니 이내 수정이 필요해졌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니 분노도 나누면 분자화되겠지만 나의 가짜 공감은 한참 티가 났을 거다. 이내 영 불편했던 나는 그가 연락을 보기 전에 셀카 한 장을 이어 보냈다. 같이 욕을 못해주지만, 오늘 하필 속상한 일이 생겨 나마저 속상하다는 진실의 미간을 찍어 보냈다.
가끔 생각한다. 너무 잘 정돈된 정보만 본 나머지 스스로가 그 정도의 상태라고 종종 착각한다고 말이다. 바람직한 걸 좇기 바쁘니 그전에 나는 어느 상태인지, 내가 얼마큼 할 수 있을지는 정작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요즘 나는 편식, 편중과 같은 단어가 새롭게 보인다. 내가 편식을 할 줄 알아서 그리고 어떤 것에 편견이 있다는 걸 발견할 때 반갑다. 내가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건 불가피하게 하나의 입장인데, 그걸 아는 게 신선하다.
몸에 좋대서 샐러드를 먹는 게 아니라 오늘은 그냥 풀과 계란이 먹고 싶었던 날이 같은 샐러드를 먹어도 묘하게 기분이 좋다.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하나 더 아는 것보다 내가 생각보다 덜 혹은 더 괜찮은 어떤 지점에 있다는 걸 발견할 때가 나의 서사의 시작이라고 느껴진다. 오늘은 그걸 놓칠 때 하는 실수를 기록한 글이다. 멋있는 척하다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떠안았으니, 나는 작심일일만에 말을 뒤집어야 한다. 오늘 내게 지피지기 백전백승은 자신을 알면 이긴다가 아니라 자신을 모르면 진다로 해석된다. 두 문장 사이에는 머쓱함과 민망함이 있다. 아, 그리고 미안해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