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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Dec 21. 2023

솔직한 게 뭐 대수라고

대화의 단서


서른에도 세상의 중심은 여전히 나다, 내가 궁금한 건 온통 나다. 내가 어떨 때 기분이 나쁘고, 어떨 때 기분이 좋은지가 관심의 대부분이다. 이처럼 글을 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이며 쓰고 난 뒤에 오는 뿌듯함이 좋아서다. 나는 세상 모든 것 중에 내가 가장 궁금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새삼 유치하지만 정말 솔직한 말이다. 유치해서 신경 쓰였지만 진솔한 말이다. 솔직함은 시비와 정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온전히 드러내는 행위 자체이기에 솔직해야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런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봐줄게”


눈앞에서 휙휙 거리는 파리채 앞에서 잘못을 이실직고해야 했던 어린 날의 기억은 당시의 긴장감을 정확히 기억한다. 솔직하면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면 수긍 말고는 뭔가 더 할 것이 없기에 그저 곤혹스러운 상황이 끝나 평화로운 나로 얼른 돌아가길 바랐다. 고레에다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 달랐던 건 상대인 아이는 아빠가 원하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구타를 당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솔직하면 맞고 거짓말을 해야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처음도 아니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그 상황에서 아이는 솔직함을 택했고 난 그 아이의 선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거짓말 대신 솔직하기를 택해서 아빠에게 맞고, 친구에게 왕따를 당한 건 아주 나쁜 일이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부정당하는 일을 겪었으니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을 상처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돼지의 뇌에 빗대어 비정상이라 하면 ‘괴물은 누구게’를 흥얼거리고, 넘어뜨려 신발이 벗겨지면 ‘신발이 벗겨졌어요’라며 털고 일어났다. 다른 아이들 앞에선 친한 티를 내지 말라는 친구에게 흔쾌히 그러겠다며 올해는 친구가 한 명도 생기지 않을 줄 알았다고 웃는다. 아파서 응어리 질 말들이 모조리 튕겨 나왔다. 무엇이 아이를 그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아이는 아는 것 같다. 모두를 속여도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를 부정하면 겪게 될 더 나쁜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한참을 감탄하다 묻고 싶어졌다. 솔직한 건 이리도 어려워야 할까? 아는 긴장감이 다시 한 번 올라왔다. 솔직함의 대가가 주변의 모든 지지를 잃을 수 있다는 압박감이라는 시나리오에 대해 따져묻고 싶었다. 나이가 드는 대가로 언제부터인가 정직이 최선이란 말 대신 솔직하면 무식한 거, 잘못을 인정하는 게 바보라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영화와 뉴스 장르 구분 없이 가상과 현실에서 보게 되는 솔직함의 대가는 솔직하지 않은 편이 낫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형성하는 듯했다. 솔직해서 좋은 점은 접하기는 힘들었다.  솔직함의 백미는 솔직하고나서 무조건적으로 찾아오는 안도와 후련함에 있으니깐.


영화 대사에서 솔직함을 잃어버린 사람을 향해 눈이 흐리멍덩하다고 했다. 눈에 초점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가. 다시 맑아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 있는가. 떳떳하지 못해 본 경험은 어땠는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경험은 정말 불쾌했다. 반대로 쫄리지만 솔직히 말하고 난 뒤에 후련함은 상쾌했다. 그런데 솔직한 게 엄청나게 특별한 일도 아니다. 다른 일처럼 해보면 별거 아닌데 하기 전이 가장 무서운 것뿐일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솔직한 게 뭐 대수라고’ 생각할 때 자주 솔직한 쪽을 택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그 아이의 가뿐한 걸음걸이에 눈길이 갔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흐리멍덩한 눈과 멍든 몸을 생각하면 무엇도 고르기 어렵지만, 경쾌한 발걸음을 생각하면 조금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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