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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Dec 22. 2023

진짜 취미

대화의 단서

회사를 마치고 영어학원까지 2시간 정도 남으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샐러드로 가볍게 밥을 먹고 다. 운동하고 왔다 할 때 “와우 원더풀”이 나온다. 당연히 으쓱한다. 월급날에 맞춰 책을 두세 권 사보는 편이고, 출근을 준비할 땐 재즈피아노를 챙겨 듣는다. 여행을 간다면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취향(向)다. 그런데 정말 쉬고 싶을 때, 쉬는 걸 일탈처럼 쉬고 싶을 때는 드라마를 본다. 그중에서도 로맨스코미디로만 본다.


로코 드라마보기는 확실한 취미다. 더글로리만큼의 흡인력이 아녀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래도 16편의 드라마를 빠른 배속, 유튜브 몰아보기가 아닌 송출본 속도대로 앉은자리에서 몰아보기를 한다. 그렇게 메인, 서브, 서서브, 서서서브의 인물관계도에서 러브라인과 우정, 가족 등 모든 관계의 티키타카를 흐뭇하게 본다. 보다 보면 재밌어서 다음화를 보고 그렇게 다음화가 없을 때까지 보게되는 진정한 취미다.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니 다음은 예찬을 할 차례다. 내가 드라마 보기를 좋아한 건, 아주 오래된 일이다. 90년대 출생이래도 나는 디지털 적응에 더딘 편이었고 네이버에서 정보검색은 숙제가 아니면 굳이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게임도 네이버키즈에서 하던 마법의 성 정도가 알맞았다. 나머지 조작은 번거롭고 귀찮았다. 반면에 텔레비전은 리모컨에서 버튼 세 개만 누를 줄 알면 되었다. 일 전원, 이 위로, 삼 아래로. 그것 말고 더 알아야 하는 건 없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집에 다른 가족이 올 때까지, 꺼진 거실에 형광등이 켜지고 부엌에서 저녁이 차려질 때까지 나는 그저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고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굳이 하나 더 하라면 내가 고른 게 최선이라 믿고 응시하는 거였다.


방법은 편한데 내용적으로는 훌륭하다. 드라마는 인생의 기승전결 그 끝에 해피엔딩을 향해가는 경우가 태반이고 권선징악의 표본이므로, 서른을 넘어서도 내가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사는 데에는 가족드라마, 로코드라마의 영향이 있다고 믿는다. 부작용이라고 하면, 넘치는 자기애로 언제나 나를 여자 주인공에 대입시켜 모든 상황은 극뽁가능한 명량한 삶을, 그래도 인생은 늘 아름답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는 거다.


어제 지쳐 방전된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말은 “너 안 그래, 네가 아무리 나빠도 너는 다른 사람한테 몹쓸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냐. 내가 알아”라며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까 봐 스스로를 의심하던 여주를 달래주던 남주의 말이었다. 저녁 일곱 시 반에 방전되서 모니터 앞에 앉아있던 나는 하루를 누군가를 도와주느라, 도움뿐 아니라 격려도 해주고 싶어 무리를 하다 탈진한 상태였다. 상대를 챙기다 정작 나를 소외한 아주 뻔한 이야기. 같은 일을 이년 넘게 하면서도 아직도 하는 무리.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브 인사로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하다가 머릿속을 이중삼중 굴리다보니 복잡해진 거다. 피로해진 거다.


그렇게 무리 할 때, “너 안 그래도 돼, 너 좋은 마음인 거 내가 알아. 그렇게 즐겁게 안 해줘도 좋은 사람인 거 내가 알아” 이렇게 말해주는 남주는 곁에 없었지먀, 드라마 내공 20년이면 누군가의 위로를 보면서 나의 위로로 해석할 수 있다. 감정선이 훈훈함과 애정으로 뒤덮인 드라마를 보며 나의 감정도 그쪽으로 전이되었다.


더 나눌 에너지도 없어 방에 혼자 누웠는데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얻어낸 것이 ‘따스해’

보고 있으면 ‘뭉클해’

‘알고 있대, 좋은 사람인 거 다 알고 있대’

다음화가 없어서 까맣게 뜬 화면을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을 들었다. ‘기다려야 하네’, ‘오늘치는 아주 충분했네’


그러고 수건을 챙겨 씻으러 간다. 돌아와서 눕는다. 손으로 배 몇 번 두들기고 목 편한 각도로 누워 잠에 든다. 그렇게 편안한 휴식을 주는 것이 로코드라마다. 이러니 어찌 로코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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