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고 주문을 건 적이 많다. 사소하게는 쪽지시험부터 해서 짝사랑하던 친구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까지 정말 여러 상황에서 '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그중에서도 일말의 의심 없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은 스키장에서였다. 주문은 할 수 있다였지만 원하는 바는 살 수 있다였다.
생애 처음으로 가 본 스키장. 계곡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수영을 배웠듯이 스키를 탈 줄 아는 친구에게서 얼추 스키를 배웠다. 초급에서 한 두 번 타고, 다음번 리프트는 중급에서 내리고 그다음은 중상급 코스에서 내렸다. 스키천재였다기 보다는 겁이 없었던 거다. 왜냐면 나는 s자를 끝끝내 배우지 못했었다.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발에 땀이 찬다. 중상급을 활강하던 순간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발모양을 바꿔 속도를 제어하거나 엉덩방아를 찍어 억지로 멈춰 세우는 쪽이 아니라 그저 입 밖으로 마음속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할 수 있다’를 외치는 거였다. 크게 여러 번 말이다.
오늘 그때가 갑자기 생각난 건 의외의 순간이였다. 이틀 전에 한차례 불만제기를 했던 한 민원인이 타 기관에 재차 민원을 제기하였고 다시 내게로 전달되었다. 이번에도 상황은 간단명료했다. 이틀 걸러 같은 사람이 나에게 강한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한 해에 있을 수 있는 나쁜 일이지만 무방비의 상태였던 걸까. 이틀 전에도 꽤나 상심한 나머지 연차를 쓰고 운동을 가고 집에서 글을 쓰며 겨우 그 사람의 안위를 바라기까지 꼬박 여섯 시간이 걸렸던 나는 재차 제기된 그 불만에서 단 몇 글자의 욕설을 보고 눈물이 터져버렸다. 맞다. 나는 겁을 먹었다.
이날도 난 헬스장으로 달려갔다. 생각을 않기 위해 무작정 달릴 작정이었지만 연초 헬스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던 나는 빈자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엔 전신거울과 아령, 덤벨 등이 있었다. 별생각 없이 양손에 4kg짜리 아령을 쥐고 동시에 들어 올렸다. 들리지 않았다. 얼른 한 개를 제자리에 갖다두고 남은 한 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가능했다.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하나, 둘, 셋, 넷을 세며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스물다섯 개를 세 번씩 했다. 순간 나는 4kg 아령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고 그러자 상한 마음이 가셨다. 왜냐하면 나는 4kg 아령도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니깐. 논리적인 이유가 아닌 그저 이해였다. 그렇게 위축될 것이 없이, 금방 괜찮아질 수 있는 마음이란 거 말이다.
이날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답변을 해야해서 다시 보는 순간 또 속상함에 눈물이 터졌다. 이런 분풀이에도 놀랄 만큼 나는 좋은 이들 곁에서 잘 지내왔다고 위로해 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아빠에게 일부러 속상한 사연을 들켜 괜찮다는 말을 들어보아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다음 소희>가 생각나고, 똑같이 욕을 해보다, 아름답게 지는 노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할 수 있다’를 무한히 외치며 스키장을 활강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조금 전 괜찮아졌던 헬스장도 생각났다. 꼭 이유가 사라져야 괜찮아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아령을 들어올리면서 괜찮아졌다면 글 한 편 쓰고 난 뒤에도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황에 의해서 되어버린 것 보다 할 수 있다는 마음과 내 행동이 더 강력하다고 믿고싶었다. 그렇지 않대도 전환을 시도할 수는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인과가 맞아야할 필요는 없었기에 상황은 뒤로 물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철학의 오래된 주제 중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란 물음이 있다. 나는 오늘로써 경험적으로 그렇다고 답해본다. 오늘 밤 잠들기 전까지 이 글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된다면 더더욱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