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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Apr 17. 2022

엄마와 함께 격리를

엄마와 함께한 7일간의 자가격리가 불러온 생각들

 작년 11월 말, 삼사십 대의 대부분을 떨어져 지내다 엄마와 다시 살림을 합치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림을 다 처분하고 좁은 엄마 집으로 몸 하나 겨우 챙겨 들어왔다고 해야겠지. 어쨌든 구순이 다 된 노모와 오십을 코앞에 둔 중년의 막내아들이 오 개월째 함께 밥을 지어먹다 코로나 19 확진으로 자가격리도 함께 하는 중이다. 오늘이 마지막 칠 일째.

 엄마와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마 초등학교 입학 이후론 처음으로 한집에서 160여 시간을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오롯이 함께 보내는 중이다. 그리고 이건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 값진 성찰의 시간이자 고통의 시간이었다.



 연세 치고 엄마의 건강 상태가 나쁜 편은 아니다. 퇴행하는 허리뼈와 다리 관절이 늘 말썽이긴 하지만 인지 능력과 소화 능력 등엔 큰 문제가 없다. 덕분에 함께 산 사 개월 반 동안 난 내 일을 하고, 엄마는 (종교활동이나 노인복지센터 활동 같은) 엄마의 일을 하며 알아서 자기 삶을 살아왔다. 마치 살림은 합쳤으되, 생활만은 각자의 굳건한 궤도를 이탈하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적당히 경계하며 눈치를 살폈다.

 가끔 경계를 허물고 먼저 치고 들어오는 쪽은 대체로 엄마였다. 오십이 다 된 자식의 종교적 신념을 부흥시키려는 소망이라던가 담배나 술과 같은 건강 관련 이슈를 꺼내 들며 선을 훅 넘는 경우가 시간이 지나며 잦아졌다. 그와 함께 내 공간과 시간이 엄마에게 결국은 잠식되겠구나 하는 암울한 예감도 함께 커져 갔다.   

   

 성인기 이후 평범치 않은 생애주기를 그려가는 내 모습을 두고 엄마와 큰 갈등 없이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분명하고도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칭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걸 강한 독립심이라고도 명명했다. 하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적당한 거리감은 사실 내게 선택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숨통이었다. 꼭 엄마나 가족뿐 아니라 누구든 중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올려놓은 담을 넘어 들어온다 싶으면 눈앞에서 매몰차게 더 높고 두꺼운 담을 쌓아 그들을 질리게 했다.

 북적이고 다정한 사람들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빠르게 체감(遞減)하고 결국 그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이 모든 관계를 뒤엎어 버리는 경험이 반복되어 갔다. 그리고 포기하는 척 즐거운 심정으로 ‘나’란 인간의 괴팍한 성정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십 이후로는.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여라. 이렇게나 사람을 곁에 두는 걸 저어하며 불편해하는 내 괴팍함이 (당연하게도) 오십이 다 되도록 혼자인 채로 날 남겨두다, 오십쯤에 혼자가 된 엄마를 인생의 마지막 짝으로 점지해주다니 말이다. 적당히 남들과 비슷하게, 눈에 안 띄게 살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으련만, 중뿔나게 바깥으로 나돌다 한 번에 멱살 잡혀 엄마에게로 다시 끌려온 형국이다, 결국엔.

         



 작년 초 우울감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약 쪼가리로는 안 될 거 같아 경제적으로 무리인 걸 알면서도 여기저기 알아본 후 심리상담을 받았다(그나마도  비싸서 몇 회 못 받았지만). 상담을 진행하다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건져 올렸다.      

 허참의 ‘몇 대 몇?’으로 유명한 ‘가족오락관’의 짭 버전이라고 할 만했지만 그런대로 80년대에 인기가 꽤 있던 TV 프로그램으로 ‘유쾌한 스튜디오’란 것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7년의 어느 날, 나는 거기 출연한 성우 배한성을 보고 얼토당토않게 그 사람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유쾌한 스튜디오’에 출연했던 그의 어떤 모습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전후 맥락은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건대, 무심하고 병약했으며 홀로 고뇌에 늘 차 있던 현실의 아빠가 채워주지 못한 어떤 결핍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TV에 비친 성우 배한성의 유쾌함이 아빠에게서 전해지는 불쾌함과 대비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뭐 사춘기 아이가 가질 법한 이상적인 아빠에 대한 상(像)이 우연히 그에게 투사되었던 거겠지. 문제는 그 감정이 꽤 강렬한 상태로 아직 남아 있던 그해 여름, 현실의 아빠가 갑자기 영영 사라져 버렸단 점이다. 당연히 내 그런 감정과 아빠의 죽음과는 어떤 인과관계도 (아마도) 없었겠지만, 어린 난 무의식의 어느 응달진 한 구석에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쌓아뒀다(라고 상담사가 말했다).


 아빠에 대한 이상화된 어떤 상을 가졌다는 것이 현실의 아비를 죽게 만들었다는 무의식 속 죄책감은 엄마에 대한 건강한 관계 설정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낯선 이들과의 관계 형성에도 부정적인(게 확실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영향을 끼쳤을 테고 말이다.

 어느 관계에나, 특히 자식이 부모와 맺는 관계 형성에서 이상화가 꼭 부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상화된 부모의 이미지와 현실의 부모와의 간극을 현실의 시공간에서 겪고 아파하고 인정하는 것은 한 인간이 성장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난 그 경험의 가능성이 (꼭 성공했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시작하는 단계에서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폭력적으로 거세당한 거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그 무의식의 트라우마가 엄마와의 관계 설정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합리적으로 의심해 보았다.

 

 되돌아보면, 난 이상화고 나발이고 엄마를 가까이서 정확하게 지켜보고 판단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욕망, 즉 이런 엄마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엄마의 모습은 정말 싫다,  같은 생각들을 사전에 금기시하고 차단해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죄악이고 죽음과 가 닿은 위험한 생각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후 (연애든 친구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욕망을 거세해 버린 채 껍데기로 만났다 물러나기를 수차례 반복해 오지 않았나 싶다. 그냥 나만의 궤도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흘끗거리기만 한 채 밀어내면서 말이다.  

   



 

 엄마는 괜찮았다, 나빴다, 그러다 다시 나아지며 코로나 19 감염 상태를 잘 이겨내는 중이다. 특별 관리군이라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씩 엄마를 대신해 지정 병원의 간호사에게 엄마의 상태를 보고했다. 엄마의 상태가 안 좋아진 확진 삼일째 되던 날은 병원 외래 진료 예약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시시때때로 엄마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래가 잘 빠져나오도록 겨울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라 앙상한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리고 묻고 또 물었다. ‘엄마, 괜찮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말해!’


 엄마를 이토록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가까이서 오랫동안 두고 지켜본 적이 없었다. 없었으니 그것이 무엇일지도 예상 못한 채 주어진 대로 온전히 경험하고 이해해야 했다. 애초에 엄마에 대해 그려본 이상적인 모습이나 경멸하고 싶은 모습이 없다 보니 낯선 이 안타까움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비쳐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다시 엄마로부터 태어나 오십 년을 살 수 있다면 한번 겪어보고 싶은 (남들 다하는) 애증의 관계가 절대 불가능하다면 난 엄마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어떤 거리감과 태도로 함께 해야 할까.

      

 격리를 통해 얻어 낸 씁쓸한 안도감이라면 이제 엄마의 육체는 너무 낡고 연약해서 내가 고집스럽게 쌓아 올린 담을 허물 집요함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상대를 봐가면서 경계할 것이지 내가 오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엄마는 내 생애 최초로 위협도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날 것의 관계가 가능한 상대가 아닐까. 엄마,라는 말이 품고 있는 거대한 시간은 내겐 대부분 텅 비어 있지만, 그래서 난 지금부터 엄마를 한 명의 가까운 시민으로서 그리고 이웃으로서 존중하겠다고 다짐은 해본다.

 

 (상담은 너무 괴롭고 비싸서) 엄마와 가까이 살아본 적 없는 과거를 다시 복원해 살아내고 회복할 용기가 없는 나는, 그냥 이렇게 생겨 먹은 나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이제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과 역사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면, 가능하다. 거리를 재지 않고 엄마와 바투 마주 앉아 살피고 들어주고 들려주는 다정한 친구로서 시시때때로 나만의 시공간을 접어두거나 오려두지 않고 펼쳐 놓는 것도.

     



 

 엄마와의 자가격리는 이제 몇 시간 후면 끝난다. 다시 엄마는 엄마의 일을 하고, 나는 내 일을 할 것이다. 살림은 합쳤으되 생활은 여전히 거리 유지를 할 것이다. 다만 엄마에게 내 시공간이 잠식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찔러대는 송곳 같은 마음은 이제 좀 무뎌지기를 바라본다. 말했듯이 엄마의 가까운 이웃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말들에 혼자 제멋대로 마음이 구겨지지 않겠다. 친구는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어디서 들은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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