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MF 즈음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찾아든 IMF 직전까지 회사도, 나도 그때는 나름 참 잘 나갔던(?) 것 같다. 너무도 잘 나가서 벌어들인 돈을 주체 못 하던 회사는 급기야 해외영업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던 간부들을 선발해 미국의 USC 마샬 스쿨의 마케팅 매니저 프로그램에 위탁교육을 보냈고, 나는 대리였지만 과.부장들 사이에 끼어 유관 업무 담당자로서 그 기회를 거머쥐게 되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팔팔한 의욕밖에 없던 한창 풋풋한 대리 시절이었던 데다가 입사해 수출부서에 배치받은 후로는 줄곧 동남아 변방의 촌스런 나라들만 담당했었다. 요즘은 '신남방정책' 국가라고 정부가 많이 키워준다는 둥 하고 있지만, 그때는 분명 '변방의 우짖는 새'같은 지역의 나라들만 주로 출장을 오가던 중이었다. 물론, 그래도 외화벌이꾼으로서 일은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에, 위대하다고 짜~하게 이 세상에 소문난' 미국'이라는 나라를 난생처음으로 가게 된지라 기대도 컸었다.
다니던 해외 출장지들 이래 봐야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도로 자동차 주행시간과 엇비슷한 5시간 내외짜리 동남아 출장이었는데 모처럼 장장 11시간이 넘는 로스앤젤레스까지의 장도에 올랐다.
난생처음 가보는 미국, 그리고 남들이 유학 가서 그리도 멋들어지게 가방 끈을 길게 늘여 온다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나성(?)에 있는 대학 USC에서의 단기 과정이나마 마케팅 교육을 받으러 출발했다. 드디어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룰루랄라~'의 본 고장 로스앤젤레스에 상륙케 된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냄새에 뒤범벅되어 저녁이면 막걸리 잔을 기울이곤 했던 서울의 변방 동네 이문동에서의 학창 시절과 도 다르고, 시청 앞 고층건물 속의 넥타이 부대 분위기와도 판이한 고즈넉하고도 아카데믹한 USC 학교 분위기가 주는 첫인상은 피교육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마침 같은 차 수에 고교와 대학과 근무부서가 같던 대학 선배 선임 과장분이 있었다. 그 평온하고 아카데믹한 USC 교정에서 미국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며칠간 연수를 받던 어느 가을날 오후에 벤치에 앉아 앉아 그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사진 출처 : 이미지투데이
- 선배 : 전 대리~~
- 나 : 뉍
- 선배 : 우리가 이문동 학교 앞 골목에서 동태찌개에 소주잔 기울이며 취해 나자빠져 있을 때, 얘네들은 이런 멋진 학구풍 교정에서 이리 진짜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녀~~ 그렇지?
- 나 : 넵. 맨날 최루탄 연기 매캐함을 이기는 데는 소주에 막걸리가 가 최고!라는 생각에 어지간히들 마셔댔었지요. 그리도 개탄할 일도 많고, 슬프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었던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기에 별반 큰 후회는 없는데, 뻑하면 휴강에 야외수업에 뭐에 그러고 보니 정작 공부는 좀 안 했네요. 쩝......
어쨌든 그때는 무지하게 착했던 시절이라 기왕 미국까지 갔으니 아메리카 문화도 좀 익히고 미국에 대해 배울 것은 배워도 오고 하자는, 마치 유길준의 신사 유람 단원이라도 되는 듯 기개가 넘쳐있었다. 생각해 보라~, 30대 초반의 쌩쌩한 대리가 얼마나 의욕에 넘쳐 있었겠는지를.
그런데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면서부터 내 계획은 좀 삼천포로 빠지는듯했다, LA 시내에 있는 무슨 '옥스퍼드 팰리스'라는 한인타운에 인접한 호텔이 교육생들의 지정 숙소였는데, 아침이면 호텔 조식으로 '선지 우거지 해장국'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위장이 촌스러워져서 해외여행 가서 맛난 '선지 우거지 해장국' 같은 것을 조식으로 내어주면 너무나 감격할 것 같은데, 그때는 자갈도 씹어 먹을 것 같이 훨훨 날아다니던 대리 시절이라 김치 없이 현지식 위주로 먹고도 끄떡없이 출장 잘 다니던 때였을 뿐 아니라, 일부러 현지 음식 챌린지 한답시고 가는 나라마다 별의별 현지식을 챙겨 먹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인도 아니라 파키스탄에 출장 가서도 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지 음식을 먹고 다녀야 한다며 기염을 토하고는, 인도풍의 '난'에 '달'은 물론, '탄도리 치킨'을 요구르트에 푹푹 찍어서 맛있다며 마구 먹고 다니던 때였기에 솔직히 미국 호텔 조식당의 '선지 우거지 해장국'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아주 제대로 고향의 맛을 재현한 것 같은 원단 선지 해장국이 호텔 조식의 양자택일 선택 메뉴 중 하나였다. 선지 우거지 해장국 아니면 육개장이라니...
더구나 저녁때 밖으로 나가면 온갖 한국 음식점들이 즐비한데, 그중에서도 'LA 북창동 순두부'와 '콩비지'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잘 먹긴 했지만, 미국을 익힌다고 왔는데 조식은 '선지 우거지 해장국', 점심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햄버거 그리고 저녁은 북창동 순두부...
숙소로 와서 그날그날의 숙제를 하고 있노라면 호텔 바깥에서 들려오곤 하는 LA 경찰 범인 추격하는 서치 라이팅 헬리콥터 소리와 총성, 탕~ 타당~ 타 다다... 그리고는 앰뷸런스 소리... 삐뽀 삐뽀 삐뽀~
호텔 창문을 열면 보이는 바깥 전경은 더욱 이채롭기까지 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쎄시봉이라는 맥주집 담장에 선명한 한글로 내걸린 현수막... '맥주 3병+과일안주=USD 27.-' 움홧홧...
아침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는 길의 좌우 여기저기에 보이는 무수히 많은 '경희 한의원', '~~ 교회'. 도대체 미국에 온 건지 한국에 있는 건지 분간이 잘 안 갈 지경이었고.
그래도 현지 음식을 위한 내 정열과 집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현지를 이해하려면 현지 음식을 먹어줘야지, 허구한 날 선지 해장국 아니면 기껏해야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현지식이라고 먹으며 지낼 수 있는 감... 아무렴'... 하면서 틈틈이 기회를 봤다.
그러다가 참다 참다못해 어느 날 주말 자유시간이 다가오자 미모의 미국인 교수 분에게 물어봤다. "에또~ 교수님, 미국의 오리지널 전통음식(Traditional Food)을 먹고 싶은데, 무슨 음식을 사 먹으면 좋을지 추천 좀 해주십시오.~"했다. 왜냐하면 교육과정 마치고 한국 가거든 누가 미국 가서 맛있는 것 뭘 먹었냐고 라고 물어라도 올라 치면. '응~, 선지 우거지 해장국과 햄버거 먹고 다녔어' 이럴 수는 없겠기에 말이다.
어쨌든, 내 질문을 들은 금발의 미국인 여교수가 좀 당황스럽다는 듯, 그리고 마치 우리나라에도 오리지널 전통음식이 따로 있나, '신토불이 유럽 것이 좋은 것 아니여'라고나 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자신도 의아하다는 듯 결국 내뱉는 말이 '터키(Turkey=칠면조)??'였다.
칠면조를 통째로 바비큐 해 먹는 것이 오리지널 전통요리??
나같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태어나 동남아 변방을 떠돌며 변죽이나 두둘 기며 살고 있지만, 늘 어느 나라를 가든 가는 곳마다 갖가지 전통음식의 다양함에 놀라곤 했던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안 갔다. 더군다나 한식의 다양함과 깊은 맛에 너무나도 오랫동안 친숙해져 졌기에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이라도 다른 나라 음식을 접해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이게 무슨 전통요리인가 싶었던 것.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은 아예 그 동남아 변방국 태국에서 아예 똬리를 틀고 눌러살고 있는 터인데, 오늘 어느 태국의 명문 골프장에서 'Buffet Arround The World'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는 국별 유명 요리 A la Carte 페스티벌을 연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이런, 유명 요리사들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6개국(태국+ 5개국) 대표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나라들 중에 떡하니 미국 성조기가 표시되어 있는 것 아닌가?
헠, 뭐지... 혹시 칠면조? 아니면 햄버거 그도 아니면 피자, 샌드위치, 핫도그, 감자칩?? 대체 뭘 만들어 주겠다고 이리 떡하니 성조기를 내세워 미국 요리를 끼워 넣은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