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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만 보고 사는 여인

시 # 19

by 이로


여인은 자신을 벽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 했다


그니 앞에 놓인 벽은

비 오는 날, 젖은 땅 곳곳

아스팔트 낮은 데 고인

거무죽죽한 물이랑 같아

피하기 마땅치 않았으니


매번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축축하고 차가운 벽에 뺨을 붙이고

바짝 엎드린 채

숨죽여야 했다


태어났기에 숨이 달렸고

그래서 계속 허기지는 몸뚱아리가

마냥 저주스러웠다


다시 말하지만

여인의 세상은

비가 오면 바깥 온갖 더러운 것들이 모이는

아스팔트 여느 구석같이 검고 축축했다


어느 날 나는

이러다 죽겠다 싶어

온몸으로 부딪히고

머리로 들이박아 벽 밖으로 달아났고

마냥 내 아픈 줄만 골몰하다

여인의 벽을 멋대로 부순 줄 모른 채

태평하게도 그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벽만 보고 산 사람아


이제 벽은 닳고 닳아

곧 으스러질 텐데

겨울 밖 칼바람에 사지가 뜯기지 않을까 두려워

떠나지도 못하고 내내

손등에 못 박고 있었느냐


그러자 당신 눈 밑에는 칠흑 같은 어둠 드리운다


사랑하는

나의 벽만 보고 사는 사람아


그러나 벽 너머엔

봄바람 아카시아 꽃내음 일렁이고

어쩌다 매섭게 폭풍우 몰아 쳐도

같이 얼싸안고 헤쳐나갈 우리가 있다


그러자 그는

온몸으로 저항하다 얼굴이 깨진 나를

온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어 쓰다듬는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했나


자글자글한 손끝 너머로

깊고 깊은 당신 눈두덩이에

내 치기와 원망을 여미고 또 여미어

고인 것을 바라본다


사랑하는

나의

벽만 보고 산 사람아


마침내

길고 긴 새벽 끝

가물가물 보인다


여인 어깨너머로

파란 봄날 피어나는 연분홍색 꽃봉오리가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아침 동이 튼다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bkksg.com

bkksg.studio@gmail.com

_이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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