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요, 저요" 초등학교 때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무언가 질문을 하면 손을 여러 명이 들었다. 서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선생님의 선택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손을 높이 들고 "저요, 저요"를 외쳐도 선생님이 나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교실에서는 함부로 말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니 교수님이 발언권을 주기 전에는 답변도 할 수 없고, 질문도 할 수 없다.
나는 여러 회사를 다녔다. 회사 마다 회의실 모습이 다르다 . 어떤 회사의 회의실 모습은 학교의 모습과 똑 같았다. 상사가 말하는 데 함부로 끼어 들면 안 된다. 엄격한 위계가 있어서 말하고 싶으면 발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상사가 말하고 있는데, 발언권을 얻지 않고 함부로 답변을 해서도 질문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회의실 모습이 완전히 다른 회사도 있었다. 상사에게 발언권을 먼저 청하지 않아도 아무 때나 상사의 발언 중에 자유롭게 끼어 든다. 상사가 못 알아들을 말을 하면 즉각 질문을 하기도 하고 상사가 묻는 질문에 생각나는 대로 의견을 말한다. 물론, 사전에 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발언권을 얻을 필요도 없다.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축구대표팀 간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이강인이 손흥민과 몸싸움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온갖 비난을 뒤집어쓴 이강인이 페이스북을 통해서 사과문을 올렸다. 한동안 진실게임이 계속되었다. 몇 주가 지나고 손흥민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강인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이강인이 손흥민에게 직접 찾아와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를 했다는 글도 사진과 함께 실었다. 손흥민의 사진과 글로 축구대표팀의 불화는 급속히 진화되었다.
만약에 페이스북이라는 창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강인과 손흥민은 신문이나 방송 인터뷰를 통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문과 방송이라는 것은 일종의 발언권을 주는 기관이다. 신문이나 방송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지 못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발언권을 간신히 얻었다 하더라도 발언의 길이도 제한되고 발언의 내용도 제한된다.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그만큼 오해를 풀기 어렵다.
나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블로그를 쓴다. 아무도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아도 내 맘 내키는 대로 글을 쓴다. 별도로 누구로 부터 발언권을 얻을 필요가 없다.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는다. 그것이 블로그의 매력이다.
과거에는 발언권이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말을 하고 싶을 때는 항상 권위자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발언권을 받지 않아도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발언권을 제한하려는 사람이 있다. 먹히지 않는다. 이미 자유로운 발언에 너무 익숙해진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