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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몽블 Jul 03. 2016

어떤 책이든 책이면 다 괜찮지? 엄마

여자다움의 굴레

1990년도 엄마의 일기에 2016년도 제 일기를 더한 글입니다. 엄마의 하루와 제 오늘이 담겼습니다.

1992.7.5. 일 맑음 엄마가 쓴 일기입니다.
: 이름 - 이슬
: 예슬, 선영  - 슬이의 친구

엄마가 교회에서 식사 당번이라 예배가 끝나고 식당에 내려가서 점심을 준비하고 슬인 예슬이 아빠와 언니 오빠들과 선교원에서 많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았다. 엄마가 설겆이를 하고 있는데 슬이가 응가를 했다고 해서 가보니 슬인 응가를 잔뜩 해서 겉에 바지까지 응가가 묻어있었다. 예슬이네가 함께 집에 와서 쉬다가 가고 슬인 지금 잠이 들었다. 예슬이 엄마 아빠가 손을 흔들자 슬이도 손을 흔들어 댔다.


날씨가 무척 무덥다.

어떻게 슬이와 함께 여름을 날까(지낼까) 걱정이다.

어제는 아빠랑 선영이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선영이는 전보다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 슬이가 칭얼거려 선영이네 집 앞 골목으로 데리고 나가 앉아 있으니 슬인 자꾸 땅을 만지려 했다. 오고 가는 언니 오빠들을 쳐다보며 좋아했다.


슬인 요즘 혀를 찬다. '쯪쯪'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짜짜'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즈음 슬인 침을 적게 흘려 엄만 기쁘다. 엄마가 어제 나무토막으로 되어있는 블록을 꺼내어 같이 놀아주니 슬인 너무 좋아했다. 책을 보면서 엄마가 집을 만들어 주자 슬인 달려들어 부수어대곤 했다. 양손에 잡고 두들겨도 보고 입에 빨아도 보고 엄마가 쌓아놓은 것을 빼서 가져가곤 한참을 놀았다.


어제 아빠가 일찍 오셔 점심을 엄마와 아빠가 함께 먹고 슬인 옆에서 '나이팅게일' 책에 나오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언니를 손으로 짚어 가면서 책장을 넘기면서 놀았다. 다른 때 같으면 밥상에 달려들어 엄마 아빠의 식사시간을 방해했을 텐데 책을 손에 들려주니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슬아 의사 선생님이 안경을 썼네 안경이 어디에 있나 짚어 봐요.' 하자 슬인 닥터의 안경을 짚었다.

그러자 아빠는 어쩌다 우연히 짚은 거라고 말씀하셨단다.

'슬아! 간호사 언니가 어디 있지?' 하자 오른쪽에 있는 간호사를 손으로 짚는다.

 

정말 슬이가 기특하구나.

슬이가 너무나 예뻐 엄마는 슬이를 꼭 안아 줬다.




2016.07.3 일요일 꾸리꾸리한 날씨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하루에 3권씩 두 달 내내 책을 읽은 적이 있었어. 나의 책 읽는 속도로 그렇게 책을 읽으려면 아침부터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어야 가능한데, 그렇게 두 달 내내 읽으면 약 180권 정도. 그런 식으로 중학교 2학년 때에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400권이 넘었으니까 공부는커녕 책만 주구장창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읽었던 책이 바로 '무협지'였어.


남동생도 읽지 않았던 무협지를 하루에 3권씩 두 달 내내 읽었던 거지. 엄마는 책을 먹던, 찢던 가까이하는 건 나쁘지 않다며 내가 어떤 책을 읽든지 별로 관여를 안 했잖아. 오히려 책 많이 읽는다고 칭찬을 했으면 했지. 하루는 학교 수업시간에도 몰래 읽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책을 빼앗겼던 적이 있어.


"누가 수업 안 듣고 책을 읽으래!"

나는 수업을 듣지 않았고, 혼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무협지 다음 내용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혼나는 게 당연했어. 하지만 선생님은 그 뒷말로 어느 여자애가 이런 책을 읽냐며 혼을 내셨어. 이해가 되지 않았지. 여자애가 읽는 책이 있고, 남자애가 읽는 책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데.


그때 생각해보면 그렇게 혼난 것보다 책을 빼앗겨 다음 내용을 빨리 보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났던 것 같아. 그렇게 [다시는 수업시간에 무협지를 읽지 않겠습니다]를 A4용지에 빽빽이 쓰고 나서야 책을 돌려받을 수 있었어.


10년이 지난 지금도 주변 여자친구들 중에 무협지를 좋아하는 친구를 찾지 못했어. 친구들 한테 무협지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거 막 싸우고 폭력적인 그런 내용 아니야?" "그런 건 남자애들이나 보지."라는 친구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굳이 무협지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아.


주변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눌땐 무협지 외에 내가 좋아하는 자기계발서 이야기나 누구나 좋아하는 작가 또는 유명한 작가 이야기를 하지.


남자가 순정만화나 연애소설을 읽으면 '변태'고, 무협지를 여자가 읽으면 '성격이 이상한 왈가닥'으로 보는 편견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 서러워. 엄마였으면 그 책이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봤을 텐데.

MBC 능력자들

와. 저 여자 무협지 읽네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드디어 기다리던 6시. 눈치를 보며 회사에서 퇴근한 나는 만화방에 들러 무협지를 한 아름 안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지나가면서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보더니 "와. 저 여자 무협지 읽네"라고 말했어. 그 함축적인 말에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멋있다' 그리고 '특이하다'. 왠지 후자일 것 같았지만.


나는 무협지 속에서 어떤 역경과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구나를 배웠고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계속해서 강해진다), 수많은 전쟁과 싸움을 통해서 남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무림의 고수들의 의와 정을 통해 정의로운 인생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그저 무협지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시각을 쫌 버리고, 나의 취향을 존중해 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인데.

신조협려(TV버전) 2006년 제작. 우민 감독

엄마는 매번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책에 편지나, 엄마가 읽고 난 뒤의 소감을 적어서 나한테 줬어. 기억나?


그럴 때마다 나는 책의 내용도 궁금했지만 엄마가 이 책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지가 늘 궁금했어. 그래서 난 엄마가 추천해 주는 책이라면 늘 끝까지 읽어서 엄마가 줄 친 부분, 맨 뒷장에 소감을 남긴 부분을 읽는걸 좋아했다? 엄마 덕분에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어떤 책을 읽어도 좋아해주고, 같이 읽어주고, 같이 생각을 공유해주는 엄마가 있어서. 정말 기특하구나 하면서 매번 안아주는 엄마가 있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고 책 맨뒤에 엄마가.


무협지 좋아하시는 여자 분?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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