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몽블 Jun 23. 2016

엄마,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다들 날 사랑하기만 하는 건 아닌가 봐.


1990년도 엄마의 일기에 2016년도 제 일기를 더한 글입니다. 엄마의 하루와 제 오늘이 담겼습니다.

1992.6.12. 금 맑음 엄마가 쓴 일기입니다.
: 이름 - 이슬
: 유림이 혜진이 보람이 - 이슬의 사촌
: 예슬 - 슬이의 친구

지난 월요일에 슬이와 엄만 강원도 외할머니 댁을 다녀왔다. 가는 길에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슬이를 봐주어서 엄만 편하게 긴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단다. 요즘 한참 전국적으로 어린아이를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엄마도 바짝 긴장을 하고 긴 여행에 화장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은근히 걱정도 되었었다. 그래서 화장실을 다녀오라는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엄마가 머뭇거리자 그 아주머니는 웃으시면서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해서 웃었단다.


슬인 낯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의 품에 안겨 올 때는 옆에 앉은 대학생 오빠의 품과 엄마 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서울까지 왔고 또 뒤에 앉은 군인 아저씨들 품에서 있다가 오곤 했었다. 장난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주면 웃고 '짝짝쿵'하고 '곤지곤지'도하고 '잼잼'도 번갈아 가면서 열심히 해대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곤 했단다.


슬인 얼마 전부터 '짜까짜까'라는 소리를 하루에도 수없이 해대면서 돌아다니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엄마가 생각하기엔 엄마가 슬이에게 시계를 보여주면서 시계 소리도 들려주면서 시계가 '째깍째깍' 움직인다고 알려 준 것을 슬이가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슬인 할머니 댁에서도 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 '짜까'를 해댔다. 그래서 외삼촌과 할머니는 그 소리가 재미있어서 '슬아! 짜까 짜까'하면 슬인 또 곧바로 '짜까'를 해대면서 놀았다.


할머니는 '짝짝쿵' '곤지' '잼잼'을 하면서 방긋방긋 웃는 슬이가 너무 사랑스러운지 슬이가 사람 애간장을 녹인다고 표현하셨단다.


슬인 할머니네 집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왔다. 마굿간에 메어있는 소와 송아지도 보고, 닭장에 들어있는 벼슬도 크고 뒤 꽁지도 큰 수탉도 보고, 장독대에 놓여있는 각종 장단지들도 보았단다.


밤에는 시골 곳곳을 개구리 울음소리가 '개골개골' 들려왔다. 유림이 혜진이 보람이 언니가 슬이를 둘러싸고 서로 만지고 건드리자 슬인 싫다고 짜증을 냈다. 슬이가 좀 컸다는 증거일까?


슬인 몇일 전부터 밥상에 손을 짚고 손으로 이것저것 마구 만지려 든다. 만지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면 소리를 마구 지르면서 양 날개를 치고 울어댄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여 엄마 아빠가 저지하려 들면 마구 악을 써댄다. 그것이 크는 과정인가 모르겠다.


시골에 갔다가 목요일날 왔다.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이라 예슬이네 집에 갔다가 예슬이 엄마가 슬이 머리를 잘라 주었다. 요즘 한창 유행인 '멕 가이버' 형 머리다. 뒷머리는 길게 기르고 귀를 둥그렇게 파는 모양이다. 머리를 깎고 나니 슬인 머슴 아이 같으다. 머리 깎기 전에 슬이가 졸렵다고 칭얼거려 입에 우유병을 물리고 슬이를 바닥에 앉혀 놓고 보자기를 씌워놓으니 슬인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 모두들 웃었단다. 거의 머리 모양이 다 완성 될쯤 슬인 스르르 두 눈을 감고 엄마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머리를 만져주니 잠이 왔든 모양이다.


집에 오늘 삼촌이 와 계셨다. 슬이 옷을 사 왔는데 남자 옷이었다. 그 머리에 그 옷을 입혀 놓으니 완전 남자아이였다. 슬아! 너무나 귀엽구나 사랑한다.


2016.6.22 수요일 제가 쓴 일기 입니다.


러브픽션이라는 영화를 다시 봤어. 처음에 불태웠다가 서서히 사그라드는 남자와 미적지근했다가 서서히 그 남자에게 마음을 여는 여자. 남녀 간의 입장 차이가 느껴졌고, 예전에 봤을 때 지루했던 내용들이 이별 후에는 대사 하나하나가 와 닿더라.

"사랑한다는 말 말고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말해줘"
"나는 너를 방울방울 해."

나는 공효진이 질투가 났어. 달달하고 방울방울 한 멘트를 듣고 싶었어. 그래서 나도 만들어달라고 떼를 썼고,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해였던것 같아.


그는 그렇게 나에게 사랑한다고, 딸기딸기포도포도해한다고 했어.

그는 그렇게 나에게 그만하자고, 헤어지자고 했어.

by.이몽블

그게 끝이었어.

살아감의 벅참이 우리를 만나지 못하게 했어. 내가 잘하겠다고, 내가 미안하다고, 우리 잘 견뎌보면 안 되겠냐고 묻고 또 물으면서 매달렸어. 나 자존심 다 던져버리고. 그는 헤어졌고, 나는 헤어지지 못했어. 동시에 헤어진다는 게 가능한 걸까? 아니,  그런 헤어짐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닐까. 진심이었다면 동시에 헤어지는 게 불가능한 것 같아. 그리워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더 이상 그 생각에 아파하지 않을 때가 헤어짐이 온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도 그 이별의 치유 과정 앞에 있는 것 같아.


술을 마셨어. 많이 마신 것은 아니었는데, 금세 취해버렸고 잔뜩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며 집에 왔어. 집에 도착하니 눈물이 나왔어.

끝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속이 너무 안 좋았고, 계속해서 먹은 것들을 게워냈어. 그를 머릿속에서 비워내는 것처럼. 속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도 잠이 오더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속이 아파도 잠이 오는 것처럼, 헤어짐이 너무 힘들고 죽을 것 같아도 그냥 그렇게 살아지지 않을까. 아프고 힘들었었던 지난날의 사랑이 금세 미화돼서 빛바래 좋았던 기억으로 내게 남겨진 것처럼, 지금의 이별도 언젠가 "그때 그랬었지." 하며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다들 날 사랑하기만 하는 건 아닌가 봐.


다 같이 집에서 아빠가 만든 막걸리 한잔씩 마시고 예전 이야기를 했던 날.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만났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엄마가 대답했지.


"아빠 회사 옆에 있는 회사를 엄마가 다녔는데, 아빠가 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만나 달라고 졸랐지."


그때 아빠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암시롱도 아닌 척 과일을 먹었는데 엄마가 아빠를 보고 "맞지?"라고 물었을 때 나 되게 엄마가 부러웠다? 사실 이번에는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환경이, 시간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로 헤어진 거니까. 그와 나는 아닌 거겠지.


엄마가 아직 만나고 있냐고 물었을 때 "아니, 헤어졌어."라고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는데. 사실 괜찮지가 않아.

어릴 때의 나는 누구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투성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게 날 더 힘들게 해.


길가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어느 그 순간순간에 이별이 내 삶 속에 끼어들어 나를 괴롭혀. 하루는 온전히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또 다른 하루는 하루 종일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이별에 관한 글귀나 노래들이 전부 내 이야기 같고, 밤에 중간중간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잠들어. 문자도 sns도 다 차단했다가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풀었다가를 반복해.


시간이 지나면 나 괜찮아 질까? 얼마나 지나야 괜찮아지는 걸까. 하루하루 그냥 버티면서 지내는 중이야. 하루에도 감정이 수십 번 바뀌어. 꼭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화가 나서 계속 욕을 하다가 우울해서 울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헤헤-웃기도 하다가 멍하니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해. 내가 미친 게 아닌지 무서워. 미쳤지 사실, 미쳤지. 끝이라는 데도 붙잡고 있는 내가 미치지 않고 뭐겠어. 다시 한번 붙잡아 볼까 생각하다가도 안될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 포기해.


그가 보고 싶어. 그래서 너무 힘들어, 엄마.

마음의 고름이 있다면 이미 곪아 터진 듯해. 이렇게 터져버렸는데 이제 딱지가 앉으려면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뭐라도 하고 싶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그때의 엄마도 아빠를 만나기 전에 나랑 비슷했겠지? 사소한 거에 상처받고 겁을 내고 아파하고. 저 일기 때의 엄마 나이가 나랑 비슷할 때니까. 엄마도 그랬겠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사랑하고 그리고 아프게 헤어지고. 그리곤 아빠라는 사람을 만난 거겠지? 나도 내 짝이 있을까? 오늘은 물음표가 많네. 나 오늘 좀 슬퍼.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내 행복은 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