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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백수 방쿤 Jan 29. 2019

여행 속의 사치, 낮잠

두 배로 낭비하는 시간은 더욱 달콤하다

1월 11일 PM 05:00, 리스본 숙소

    친구들과 최고의 낭비에 대한 수다를 떤 적이 있다. 요플레 뚜껑 핥지 않기. 소주를 시켜 한 잔만 먹고는 김빠졌다며 새로 시키기. 양념치킨 양념만 빨아먹기 등. 기상천외한 낭비방법이 나왔지만, 경험상 최고의 낭비는 물질적 낭비가 아니라 시간 낭비다. 돈만 있으면 실현 가능한 낭비는, 풍요로운 누군가에게는 낭비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요플레 뚜껑의 비릿한 맛이 싫어서, 술 남기는게 싫어서, 다이어트 중이지만 양념치킨의 맛이 그리워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행위들은 내 기준에서는 낭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간 낭비야 말로 최고다. 마감을 코 앞에 두고 30분 정도 게임하기. 시험기간에 공부하다 말고 만화책 정주행 하기 등.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시간을 사르르 녹여 없애는 것은 마치 갓 뽑아낸 따끈따끈한 솜사탕에 코부터 파묻고 달짝지근한 향과 함께 혀를 놀리는 것과 같다. 얼굴에 잔뜩 묻을 설탕구름이야 개의치 않고 그 모든 달콤함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다시 오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있었던 유럽에서의 지금들도 그렇다. 어제나 저번주, 혹은 한 달 전으로 말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들.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 속에서 꿈꾸던 낮잠들이 유난히 그립다. 


    여섯 개의 숙소를 옮기는 여행. 리스본은 그 중 네 번째 도시였다. 절반의 경계를 막 넘어 점심쯤 도착한 숙소는 가히 반백년은 넘은듯한 유럽식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건물의 3층 방이었고, 계단으로 이루어진 언덕을 28인치 캐리어를 들고 올라갔다. 그간 버티고 버티던 '하루도 낭비할 수 없다'라는 생각은 체크인 하는 순간 파사삭- 무너졌고 마트에서 대충 장을 본 후 쉬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챙겨간 노트북에는 HDMI 단자가 있었고, 반백년 된 아파트라도 IPTV와 함께 HDMI 케이블이 있었으니, 직전 도시였던 마드리드에서 산 하몽 프링글스와 마트에서 산 3유로짜리 와인. 그리고 스카이캐슬.


    와인에 취해 반쯤 눈을 감고 일어나보니 해질녘이었다. 반나절을 휴식에 사용한 것은 처음이다. 여행 중 이토록 게으를 수 있구나 싶었다. 창 밖 저 멀리 벨렘지구의 철교와 강건너 예수상이 보였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 싶었다. 리스본의 겨울 온도는 서울의 늦가을과 다르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따스한 햇빛과 함께 바스락 거리는 솜이불 안에서 뒹굴대니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 여행을 낭비하니 더 없이 달콤하구나. 


    떠나지 않았더라면, 리스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해 잘 드는 남서향 3층 코너 숙소를 잡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 경험을 이불 안에서 실컷 경험하고 왔다. 내 인생 최고의 낮잠이었다. 리스본에서 무엇이 제일 좋았냐 묻거든 첫 째는 진지냐, 둘 째는 바깔라우, 셋 째는 아늑하고 오래된 숙소와 낮잠을 꼽겠다. 그렇게 여행의 나머지 절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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