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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Apr 03. 2020

독해력 높이기

국어, 영어에만 독해가 있는 게 아니다. 음악에도 엄연히 독해력이 필요하다.

어떤 연주회에 가면 "저 사람 저 곡을 전혀 모르고 있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 리듬, 화성, 구조 등의 기본 요소를 통해 나타나는 곡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해석(interpretation)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인 독해(comprehension)가 안되는 것이다. 맥락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루바토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다를 것이 뭔가?


오늘은 내가 Collaborative Pianist로서 음악 독해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내가 처음 본격적으로 반주 공부를 시작한 건 2005년 클리브랜드 음악원에서다.  Franck violin sonata, Beethoven violin sonata, Brahms cello sonata... 나는 지금 현악기 전문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자주 연주되는 스탠다드 레퍼토리들은 클리브랜드에서 모두 처음 배웠다. 이런 곡들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것은 참 좋았는데, 전공 교수님이 가다 한 번씩 하기 싫은 금관 반주를 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뭐, 누군가는 금관 반주도 하기는 해야 하니까 내 순서가 돌아온 것뿐이지만 꼭 나한테는 남들이 유독 기피하는 어려운 곡들이 주어졌다.


Paul Creston Trombone Fantasy

Hindemith Horn Sonata


학교 문 닫을 때까지 연습하는 버릇이 이때 생긴 것 같다. 못하겠다는 소리는 하기 싫고 어렵긴 너무 어렵고... 교수님은 미국에 브라스 밴드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며 금관 레퍼토리가 너의 Bread & Butter (밥벌이 수단)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마음에 안들었다. 뽀대나게 바이올리니스트랑 연주여행 다니고 싶지 누가 밴드 반주하고 싶냐며 ㅋㅋㅋ


아무튼... 이렇게 복잡한 곡들은 구조를 명확하게 꿰지 않으면 따라가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아노를 안치는 시간에도 악보를 들여다보고 공부를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곡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리고 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 시간 내에 못 배울까 봐 겁도 많이 났고. 그때는 하기 싫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내 능력 밖의 현대곡들을 분석한 덕분에 독해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줄리어드에 가게 됐다. 그런데 줄리어드는 클리브랜드보다 학교가 훨씬 크고 경쟁적이어서 스스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자기 PR을 하지 않으면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근데 나는 연습은 잘할 수 있지만 다른 종류의 것들은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처음에 일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기피하는 곡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Penderecki Viola Concerto

Hindemith Trombone Sonata

Hindemith Bass Sonata (심지어 이 곡은 솔로 튜닝, 오케스트라 튜닝 두 조를 따로 배워야 했음)


남들이 안하는 곡을 레퍼토리로 갖고 있으면 그게 나의 무기가 된다. 내가 사람을 쫓을 필요가 없으니 당당할 수 있다. 배울 때는 고생하지만 보람이 있다. 우선 Hindemith를 이것저것 하도 많이 치다 보니 현대곡이 아닌 고전처럼 느끼게 됐고 (실제로 신고전주의임), 이렇게 하나둘씩 일을 하다 보니 이름이 알려져 어느덧 Franck Sonata 같은 곡은 1년에 스무 번쯤 치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편안했었는데, 2010년 뉴욕주립대 일을 시작하면서 이전과 완전 다른 타입의 challenge를 경험했다.


Webern 4 pieces for violin & piano

Webern 2 pieces for cello & piano


이건 뭐지??????????  이전까지는 곡이 너무 복잡해서 어려웠다면 Webern은 악보 자체는 한산하다. 아니, 정보랄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한쪽짜리 악보에 완벽한 소나타 형식이 압축되어 있다는 것, slur에 담긴 Viennese elegance, 다이내믹과 에너지의 상관성, 쉼표의 드라마... 이러한 암호해독을 해내기까지 스스로도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은 연주를 몇 번이나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곡들을 여러 번 연주했어야 해서 반복해서 들여다볼 수 있었고, 작은 단서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전보다 훨씬 까다롭게 악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Webern을 공부한 덕에 Schubert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


독해력을 높이려면 우선 독서를 많이 해야 하고, 글을 읽으며 분석적 사고를 해야 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많은 곡들을 접해보고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지정곡 입시문화는 해롭다. 시험에 나올 책 한 권만 달달 외우게 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외운 것은 까먹는다. 이해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까먹는 마당에... 그래도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분석력을 갖추면 다음번에는 훨씬 짧은 시간에 훨씬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을 읽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독서는 사람이 분별력, 통찰력을 갖고 일상을 보다 흥미롭고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나는 인생도 음악도 눈 크게 뜨고 잘 보고 싶다. 그래서 바깥 생활을 자제하는 이 시기에 나에게 숙제를 줬다:


1. 박경리 소설 토지 완독 (이제야...)

2. Bloch Schelomo

3. John Corigliano violin sonata


똑똑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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