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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Apr 03. 2020

상상을 현실로

세상에 피아니스트는 넘쳐나게 많다. 잘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동기들하고만 경쟁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아니스트와 경쟁하게 된다(세상이라고까지 하는 게 약간 과장이라면 적어도 내가 활동하는 지역의 모든 학생 및 기성 연주자). 학생일 때는 학교에서 주어지는 프로젝트도 많고 부모님이 열성적이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를 나와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온다.


2009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있는 곳은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뉴욕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네트워킹이 되는 미국인(유태인)도 아니고, 덩치 좋은 피아니스트들을 힘으로 이길 수도 없어서 내가 아니면 안되는 특별한 무기가 필요했다.


실내악을 할 때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과 연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남 리싸이틀에 의뢰를 받아 연주하면서 내 일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지 않고, 혼자 치는 건 잘해도 매 순간 진심으로 듣고 반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이 꿈에서 듣던 대로 피아노를 쳐주고 싶었다. 그냥 이 정도면 괜찮다 하는 것 말고 그들이 혼자 연습할 때 상상하며 듣는 소리를 현실에서 내주고 싶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듣는 것까지는 하더라도 내 피아노 실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쳐줄 수가 없을 때는 얼마나 미안하던지. 혹시라도 파트너가 실수를 하면 그게 나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신경 쓰였다. 나랑 같이 연주하는 사람이 최적의 상태에서 자기 실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고, 내가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닭살 돋는 얘기지만 실내악은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음악을 할 때는 연애하는 기분으로 해서 그런가 남의 꿈(?)을 이뤄주려는 노력의 시간이 지겹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겠다는 내 꿈에 꽤 가까워진 것 같다.


레슨을 할 때도 그렇다. 선생의 역할은 학생들의 문제에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자기 스타일을 강요하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는 것은 학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도 다 생각이 있고 원하는 그림이 있다. 아직 그걸 실행할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니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일이다. 그래서 내가 많이 묻는 말은 "Is it closer to what you wanted?"이다.


물론 나도 원하는 게 있다. 마치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남에게 맞춰주는 것처럼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내 고집도 장난이 아니어서 모든 사람이 수긍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얘기하다 보면 리허설, 레슨시간은 늘 너무 짧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나를 소개하곤 한다: I am a very talkative p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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