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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Nov 04. 2020

토지 읽기를 마치고

드디어 박경리 <토지>를 완독했다. 몇 년째 1권만 다시 읽고, 다시 읽고 하다가 올해 코로나 프로젝트(?)로 결심하고 시작했는데 8개월만에 끝이 났다. 2020년은 <토지> 덕분으로 나를 잘 추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인물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묘사가 더없는 entertainment였던 데다, <토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요즘 정세와 겹쳐지는 게 많아 공부도 많이 되었고, 수많은 인생의 기승전결을 지켜보며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다.




우리나라에 박경리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의 긴 호흡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도 대단하고, 당신의 글에서 뿐 아니라 토지의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술가의 정신과 태도는 정말  감명깊다.  


"자네는 기량과 모양은 그만하면 돼 있네." (조병수)

"죄송합니다." (김휘) 

휘는 엉겁결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병수는 그런 말을 처음 했기 때문이다. 

"한데 가락과 장단이 없어." 

".....?"

"가락과 장단이 무엇이겠나?"

"예......"

"그것은 움직이며 살아난다는 것일세. 기량과 모양은 열심히만 하면 대개 그쯤은 될 수 있어. 나무조각 쇠붙이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예삿일은 아니다. 그것에 가락이 있고 장단이 있으면 그래야만 명공(名工)일세. 절 처마 밑의 풍경 소리를 생각해보게."


- 박경리 <토지> 16권 중에서




박경리 작가는 자신 인생의 고난 고뇌와 작가로서의 성공을 맞바꿨다 했는데(성공한 작가보다 차라리 편안한 삶이었기를 바랐노라고), 예술은 정말 그런 것 같다. 인생을 겪으며 깊어지고 단련된 것이 비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기술은 나뭇조각,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다. 


돈과 허영으로 내가 예술가다 하며 홍성숙처럼 행세할 수도 있지만 그걸 진심으로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제대로 배우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보 취급을 당한다. 명망 있는 가문이니 찍자 붙여보려고 홍성숙이 찾아갔을 때 서희가 겸손하게 "나는 소양이 부족하여 예술은 잘 모르오" 하며 돌려보낼 때 어찌나 꼬숩던지. 


서희 남편 길상과 아들 환국은 진짜 예술가다. 길상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원력(*불교인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갖는 내적인 결심과 그에 따르는 힘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라 함)을 다해 그린 관음 탱화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길상은 평생 최 씨 집안을 보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붓을 잡지 않았지만 그의 인품과 경험으로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평생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들 환국이는 아버지에 비하면 엘리트 미술학도인 셈인데, 아버지의 탱화를 보고 자신의 실력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걸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예술적이라 생각한다. 


토지의 수백 명 인물들 중에 내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준 인물은 조병수이다. 조병수는 꼽추이고, 10새x 조준구의 아들로 태어나 (욕하고 싶지 않은데 조준구라는 인물을 설명할 찰떡같은 단어가 이것밖에 없다 ㅡㅡ;;) 부모로부터 타인한테보다 훨씬 심한 박대를 받는다. 그러나 외로움을 자연과 책으로 달래어 학문적 소양과 지혜를 갖추었고, 그 누구보다 양심적이며 순수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선량한 사람들 등쳐먹는 부모에 대한 수치심, 죄책감으로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살아남아 나중에는 소목수가 되었는데 도를 닦는 심정, 부모의 악행을 대신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개장을 만드는 데 몰두하여 장인으로 인정받는다. 


어릴 때는 장애 때문에 수모도 많이 겪었지만, 소목일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일구게 된 이후로는 그의  예술성을 높이사 선비로까지 받드는 사람들이 있었고 김휘의 존경받는 스승이 된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인품이 드러나는 얼굴은 사람들이 반해서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였다. 


조병수를 닮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그처럼 맑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고, 겪는 고난이 기품 있는 침착함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고, 그런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으로 나타난다면 정말 좋겠다.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가락과 장단이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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