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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Feb 26. 2021

어떻게 죽을 것인가 (1)


제목만 보면 좀 무서우려나... 그런데 이건 내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문제이다.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할 얘기가 많아서 글을 몇 편으로 나눠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을 좋아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친했고, 엄마 친구들이랑 같이 껴서 놀고 그랬다. 어른들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어 그런지 대화하는 게 불편하지 않고, 하시는 말씀들을 듣는 게 재미있다. 앞으로 나이가 들면 어떤 변화가 오는지를 옆에서 관찰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어른들이랑 놀다(?) 보니 또래들은 좀 시시하게 느껴진달까, 내 나이에 가져야 할 에너지가 떨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말이다. 나는 젊은이답게 유행을 따르거나 미친 듯이 놀아본 적이 거의 없다.  



암튼 어른들을 늘 보면서 자라서 그런지, 나는 일찍부터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왔다. 초등학생 때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언젠가 돌아가시겠지' 하면서 울기도 했고, 점점 크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70대, 80대, 90대가 되는 것을 봤다. 죽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건 아빠가 암 진단을 받으면서다(2010년). 인간의 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은 다시 데려갈 거면서 왜 인간을 이 땅에 보내시는 걸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사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허무해서 죽어버리겠네...) 

한 번밖에 못 사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읽었던 것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였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클리셰 같지만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내 가까운 사람과 나누는 진심이 없이는 삶이 외로워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에 아빠 때문만이 아니라, 일적으로도 내가 영악하게 정치, 영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었는데 (그런 거 좀 못해도 괜찮다고)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허울만 좋게 잘나가는 사람보다 진짜 내 팬이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아파서 죽거나, 늙어서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병 없이 건강했던 사람이 한순간 어떻게 될지 어찌 아는가. 내가 아빠보다 먼저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니 '암'이라는 단어의 충격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전화로 부모님께 자주 했던 말이 "내가 여기서 독거인으로 갑자기 죽어서 발견되더라도 내가 진짜 행복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였다. 내일 죽어도 억울하지 않게 살기,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2018년, 이제 아빠에게 항암제가 듣지 않아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다. 그동안 치료를 받으며 막연히 괜찮으려니 하다가 정말 그리 멀지 않은 데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걸 알면서 사는 기분은 어떤 것일지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내가 귀국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때였는데, 1년 반 뒤에 떠난다는 사실을 학교에 알리고, 학생들이랑도 미리 인사를 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고, 그동안 바빠서 못했던 뉴욕 구경도 했다. 뉴욕에서의 일을 정말 좋아했고, 또 나의 젊은 시절 20,30대를 불살랐던 곳이어서 떠나는 게 정말 아쉬웠다.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앙인으로서 인간의 생을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맞아주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해도 이 여행지를 떠나는 것은 너무너무 아쉽겠지. 아빠도 얼마나 섭섭하고 아쉬울까... 하지만 아쉽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여행이었다는 뜻이다. 고생스럽고 싫었으면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나 빨리 가고 싶을 테니 말이다. 



드라마 같은 데를 보면 암 환자라 하면 세상 비극을 다 짊어진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우리 가족에게는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빠의 경우, 진단을 받은 후 10년을 사셨고, 남들 보기에는 아픈 거 전혀 모르게 활동적이고 유쾌하게 지내셨다. 아빠처럼 시간이 주어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하게 보내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평균수명에 비해 70은 너무 이른 나이여서 아쉽기는 하지만, 반대로 아빠가 100세까지 사시며 거동이 불편하다던가 정신이 오락가락하신다던가 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쉽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연명치료는 절대 싫다고 미리 신신당부를 하시고, 호스피스에서 깨끗하고 평화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아빠가 부럽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그렇게 깔끔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오래 사는 것과 오랫동안 '품위 있게'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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