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수업 콘텐츠로 쓸 연주 영상을 촬영했다. 코로나만 아니면 학생들도 부르고 관객이 있는 상태로 진행을 했을 텐데 그냥 무관중으로 녹화했다. 프로그램 구성도 괜찮고 길이도 45분 정도라 런치 콘서트 정도로 했으면 딱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쉽다.
연주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만족. 일단 이렇게 일을 벌여서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좋았고, 일부러 그동안 많이 안 하던 피아노 솔로랑 성악 가곡도 넣어 공부해보길 잘한 것 같다.
이번의 가장 큰 이득은 겸손함을 배웠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칠 때 정말 겸손해야 된다는 것. 낮은 자세로 흐름에 나를 맡겨야 하는 것이지 내가 뭘 한다고 생각하고 덤벼들면 안 된다. 내가 뭘 하려고 했을 때는 힘만 들고 원하는 뉘앙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분명 poignant (애절한, 가슴 아픈) 분위기를 떠올렸는데 녹음해서 들어보면 왜 그렇게 당차고 짜증나는 소리만 나던지 ㅡㅡ;; 빠른 패시지도 집에서 혼자 연습할 땐 잘 되는 것 같아도 실전에서 엉길 때가 있는데 그것도 다 건방짐 때문이다. 집에서와는 액션이 다른 피아노에 내가 적응을 해야 하는데 건방지게 지배하려 드니까 그쪽에서 나를 퇴짜놓는 것이다. 납작 엎드려 '나를 다 가지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최선이다. 피아노도 인생도 다 그런 것 같다.
사실 지금 몹시 피곤한데, 짧은 프로그램에 왜 이렇게 지치냐 생각해 보니 걱정을 너무 해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이게 내 수업을 위해 내가 기획한 연주이다 보니 섭외한 사람들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지랄맞은 (according to my mother) 성격을 티 내지 않으려 하는 것에 스트레스가 있었다.
실력이 괜찮은 연주자를 찾는 일도 쉽지 않지만, 실력보다도 '태도'가 좋은 사람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 나한테야 <니 연주 vs. 내 연주>, <큰 무대 vs. 작은 무대> 상관없이 모든 기회가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걸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보는 눈에 상관없이 음악이 내 자존심인 것은 나만 그런 거고, 나처럼 안달복달하며 모든 연주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프로페셔널답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대~충 연습해서 말로만 그럴싸하게 여우같이 구는 사람들이 많아 한국에서 음악은 못하겠다고 어느 정도 마음을 접었는데, 그래놓고 굳이 내가 연주를 기획해서 또다시 상처를 받는 건 아닌가... 괜한 짓을 한 걸까? 하고 걱정이 됐었다. 다행히 이번에 같이한 사람들은 호감이었다. 그들의 마음속까지 내가 알 순 없지만 어쨌든 리허설하는 과정이 즐거웠고, 성의껏 임해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본 연주에 대한 복기 :
1. 레코딩은 재미가 없어 ㅠㅠ
레코딩은 사고가 나면 편집할 수 있는 세컨드 찬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싫다. 나 말고도 레코딩 싫어하는 뮤지션들이 많음. 사람들 많은 데서 하는 연주가 훨씬 자연스럽고 결과도 낫다. 라이브 연주를 촬영하는 것은 괜찮은데, 녹화가 주 목적인 연주는 딱 스튜디오 부스처럼 갑갑한 느낌이 든다. 이번 프로그램이 한 번 쓰고 버리기(?)는 좀 아까워서 사람들과 에너지 호환이 되는 환경에서 한 번 더 연주해보고 싶기도 한데 귀차니즘이;;;
2. 연습은 꼼꼼하게, 연주는 과감하게.
이건 촬영해 주시던 PD님 반응을 보고 생각하게 된 건데,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의 입장과 듣는 사람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는 것. 듣는 사람은 연주의 에너지와 분위기를 듣는다. 사실은 내 솔로곡 Mendelssohn이 연주하기 전에 제일 무서웠었다. 연습을 많이 해도 이상하게 솔로곡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진짜 다 내려놓는 심정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쳤는데, 신기하게도 이 곡에 PD님 반응이 가장 열렬했다는 것이다. 제일 많이 틀렸는데...! 연주를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execution(실행 능력이라고 해석해야 되나? 실수 없이 하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음악도 조심스러워진다. 참하긴 한데 매력이 좀 떨어진달까? 퍼포먼스는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적일 필요가 있는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관객에게 전해지는 에너지가 연주자의 자기만족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다.
3. 성악 반주는 out of my league.
성악 레퍼토리에도 좋은 곡들이 정말 많고, 이번에 노래해 주신 테너분은 내가 만났던 (강조!) 성악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common sense를 지니신 분이라 같이 작업하는 게 힘들진 않았지만 역시 성악 반주는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피아노 파트만 보면 기악 소나타에 비해 음표도 적고 간단해 보이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다. 성악 반주는 언어를 모르고는 절대 할 수가 없다. 내가 기악 음악의 articulation에서 자음과 모음을 듣고 문장을 듣듯이 성악곡에는 가사의 발음과 시의 의미가 있는데 나는 그런 공부를 거의 안 해봤다. 근데 궁금하지가 않...... zzz
나는 한국 가요를 들을 때도 가사가 귀에 안 들어오는 철저히 기악 성향의 인간이라 성악곡 텍스트를 공부할 시간에 기악곡 하나를 더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실내악이 좋다 ^^;;
4. 피아노 솔로는 계속해봐야겠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실내악만 마냥 바라보고 있다간 속상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다. 독립적으로 나의 행복을 찾는 것도 필요할 듯. 혼자 즐겁게 지내다 재수가 좋으면 실내악도 재미있게 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님 말고. 한국에서 실내악 전문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귀국할 때 꿈이 너무 야무졌나 보다 ㅋㅋㅋㅋ 암튼 솔로 플레잉은 실내악 플레잉에도 도움이 되니까 계속해보자.
5. 다음부터는 관객이 있든 없든 공간이 좀 넓고 울림이 있는 데서 해야겠다. 녹음한 거 들어보니 진짜 완전 생소리가 난다 ㅠㅠ 친구한테도 들려줬더니 갱장히 정직하게 들린다고 하더라. 음악에도 메이크업이 필요하다.
* 학교에서 촬영해간 거는 저작권이 학교에 있어서 포스팅이 될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녹음해온 거를 동영상으로 만들어보긴 했는데, 공짜 편집 프로그램을 썼더니 저 위에 로고 뜨는 거 봐 ㅋㅋ 그래도 나 이제 동영상 만들 줄 아는 여자다~
* 녹음 퀄리티는 이해 바랍니다. 마이크(Shure MV51)를 샀는데 솔직히 폰 마이크랑 뭐가 차이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리버브 reverb 따위 없는 날것 그대로의 연주입니다. 발가벗겨진 느낌 ㅠㅠ 화장실 가서 틀어놓으면 좀 나으려나요;;;
* 나는 죽었다 깨나도 유튜버는 못할 듯. 파일 용량이 커서 유튜브에 소장용으로 올려놓는 것뿐인데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