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경 Apr 24. 2021

4월 21일 연주 복기

엊그제 수업 콘텐츠로 쓸 연주 영상을 촬영했다. 코로나만 아니면 학생들도 부르고 관객이 있는 상태로 진행을 했을 텐데 그냥 무관중으로 녹화했다. 프로그램 구성도 괜찮고 길이도 45분 정도라 런치 콘서트 정도로 했으면 딱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쉽다.




연주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만족. 일단 이렇게 일을 벌여서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좋았고, 일부러 그동안 많이 안 하던 피아노 솔로랑 성악 가곡도 넣어 공부해보길 잘한 것 같다.


이번의 가장 큰 이득은 겸손함을 배웠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칠 때 정말 겸손해야 된다는 것. 낮은 자세로 흐름에 나를 맡겨야 하는 것이지 내가 뭘 한다고 생각하고 덤벼들면 안 된다. 내가 뭘 하려고 했을 때는 힘만 들고 원하는 뉘앙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분명 poignant (애절한, 가슴 아픈) 분위기를 떠올렸는데 녹음해서 들어보면 왜 그렇게 당차고 짜증나는 소리만 나던지 ㅡㅡ;; 빠른 패시지도 집에서 혼자 연습할 땐 잘 되는 것 같아도 실전에서 엉길 때가 있는데 그것도 다 건방짐 때문이다. 집에서와는 액션이 다른 피아노에 내가 적응을 해야 하는데 건방지게 지배하려 드니까 그쪽에서 나를 퇴짜놓는 것이다. 납작 엎드려 '나를 다 가지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최선이다. 피아노도 인생도 다 그런 것 같다.


사실 지금 몹시 피곤한데, 짧은 프로그램에 왜 이렇게 지치냐 생각해 보니 걱정을 너무 해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이게 내 수업을 위해 내가 기획한 연주이다 보니 섭외한 사람들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지랄맞은 (according to my mother) 성격을 티 내지 않으려 하는 것에 스트레스가 있었다.


실력이 괜찮은 연주자를 찾는 일도 쉽지 않지만, 실력보다도 '태도' 좋은 사람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 나한테야 < 연주 vs.  연주>, < 무대 vs. 작은 무대> 상관없이 모든 기회가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걸 기대하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보는 눈에 상관없이 음악이  자존심인 것은 나만 그런 거고, 나처럼 안달복달하며 모든 연주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프로페셔널답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 연습해서 말로만 그럴싸하게 여우같이 구는 사람들이 많아 한국에서 음악은 못하겠다고 어느 정도 마음을 접었는데, 그래놓고 굳이 내가 연주를 기획해서 또다시 상처를 받는  아닌가... 괜한 짓을  걸까? 하고 걱정이 됐었다. 다행히 이번에 같이한 사람들은 호감이었다. 그들의 마음속까지 내가   없지만 어쨌든 리허설하는 과정이 즐거웠고, 성의껏 임해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본 연주에 대한 복기 :


1. 레코딩은 재미가 없어 ㅠㅠ

레코딩은 사고가 나면 편집할 수 있는 세컨드 찬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싫다. 나 말고도 레코딩 싫어하는 뮤지션들이 많음. 사람들 많은 데서 하는 연주가 훨씬 자연스럽고 결과도 낫다. 라이브 연주를 촬영하는 것은 괜찮은데, 녹화가 주 목적인 연주는 딱 스튜디오 부스처럼 갑갑한 느낌이 든다. 이번 프로그램이 한 번 쓰고 버리기(?)는 좀 아까워서 사람들과 에너지 호환이 되는 환경에서 한 번 더 연주해보고 싶기도 한데 귀차니즘이;;;


2. 연습은 꼼꼼하게, 연주는 과감하게.

이건 촬영해 주시던 PD님 반응을 보고 생각하게 된 건데,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의 입장과 듣는 사람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는 것. 듣는 사람은 연주의 에너지와 분위기를 듣는다. 사실은 내 솔로곡 Mendelssohn이 연주하기 전에 제일 무서웠었다. 연습을 많이 해도 이상하게 솔로곡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진짜 다 내려놓는 심정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쳤는데, 신기하게도 이 곡에 PD님 반응이 가장 열렬했다는 것이다. 제일 많이 틀렸는데...! 연주를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execution(실행 능력이라고 해석해야 되나? 실수 없이 하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음악도 조심스러워진다. 참하긴 한데 매력이 좀 떨어진달까? 퍼포먼스는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적일 필요가 있는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관객에게 전해지는 에너지가 연주자의 자기만족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다.


3. 성악 반주는 out of my league.

성악 레퍼토리에도 좋은 곡들이 정말 많고, 이번에 노래해 주신 테너분은 내가 만났던 (강조!) 성악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common sense를 지니신 분이라 같이 작업하는 게 힘들진 않았지만 역시 성악 반주는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피아노 파트만 보면 기악 소나타에 비해 음표도 적고 간단해 보이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다. 성악 반주는 언어를 모르고는 절대 할 수가 없다. 내가 기악 음악의 articulation에서 자음과 모음을 듣고 문장을 듣듯이 성악곡에는 가사의 발음과 시의 의미가 있는데 나는 그런 공부를 거의 안 해봤다. 근데 궁금하지가 않...... zzz

나는 한국 가요를 들을 때도 가사가 귀에 안 들어오는 철저히 기악 성향의 인간이라 성악곡 텍스트를 공부할 시간에 기악곡 하나를 더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실내악이 좋다 ^^;;


4. 피아노 솔로는 계속해봐야겠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실내악만 마냥 바라보고 있다간 속상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다. 독립적으로 나의 행복을 찾는 것도 필요할 듯. 혼자 즐겁게 지내다 재수가 좋으면 실내악도 재미있게 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님 말고. 한국에서 실내악 전문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귀국할 때 꿈이 너무 야무졌나 보다 ㅋㅋㅋㅋ 암튼 솔로 플레잉은 실내악 플레잉에도 도움이 되니까 계속해보자.


5. 다음부터는 관객이 있든 없든 공간이 좀 넓고 울림이 있는 데서 해야겠다. 녹음한 거 들어보니 진짜 완전 생소리가 난다 ㅠㅠ 친구한테도 들려줬더니 갱장히 정직하게 들린다고 하더라. 음악에도 메이크업이 필요하다.




* 학교에서 촬영해간 거는 저작권이 학교에 있어서 포스팅이 될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녹음해온 거를 동영상으로 만들어보긴 했는데, 공짜 편집 프로그램을 썼더니 저 위에 로고 뜨는 거 봐 ㅋㅋ 그래도 나 이제 동영상 만들 줄 아는 여자다~


* 녹음 퀄리티는 이해 바랍니다. 마이크(Shure MV51)를 샀는데 솔직히 폰 마이크랑 뭐가 차이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리버브 reverb 따위 없는 날것 그대로의 연주입니다. 발가벗겨진 느낌 ㅠㅠ  화장실 가서 틀어놓으면 좀 나으려나요;;;


* 나는 죽었다 깨나도 유튜버는 못할 듯. 파일 용량이 커서 유튜브에 소장용으로 올려놓는 것뿐인데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ㅡㅡ;;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음악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