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까짓 거…
음악을 전공한다는 것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아니 언제까지 '이 마음으로' 할 수 있을지...
가르칠 수 있어서 좋은 것은 아직 순수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태도가 어때야 하고, 어떤 정도의 몰입과 자기 규율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지를 떳떳하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것이 좋다.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때가 어쩌면 학생들과 같이 있을 때인 것 같다. 내가 치는 곡 하나, 그게 뭐라고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리는지. 어른이 되어서 삶의 이런저런 고달픔을 겪다 보면 음악 따위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학생들에겐 그게 전부다. 음악으로 생활이 꽉 채워져 있고, 그깟 실기시험, 그깟 연주 한 번이 아이들에게는 너무 중요하다. 나도 그래봤기 때문에 학생들의 그 시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한 지 알고 있다.
내가 아직 학생으로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여름 방학에 한국에 와서 건강 검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 유방 초음파를 받는데 갑자기 검진해 주시던 분이 원장님을 불러와야겠다며 나가시는 거다. 무슨 큰일이 났구나 싶으면서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어쩌지를 그 찰나에 생각해 봤는데 '미국에 돌아가서 학교는 마쳐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만큼 학교 다니면서 음악을 하는 게 좋았다. 죽기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고 행복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나름 침착하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중이었는데 사실 그 초음파, 별문제가 아니어서 그냥 망상이 되고 말았다.
그때가 내가 클리브랜드에 있던 시절이니 2006년쯤이었을 것이다. 그 후 뉴욕으로 가서 학교는 2009년에 졸업했지만 2019년에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 학생 모드로 살았다. 학교에서 일하니까 계속 학생들을 보게 되고, 나보다 20년, 30년 나이 많으신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음악에 대한 한결같고 부끄럼 없는 태도를 강조하시니 옆에서 보는 나도 학생에게나 있을 법한 청렴주의(?)가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정말 공감했던 게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장면이다. 바둑 따위 한판 이기고 진다고 세상에 아무 영향도 없는데 왜 그렇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냐는 말이 너무 와닿는다. 실제로는 내가 하는 연주 하나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생김이고 나의 인생이라고 선생님들도 미생과 똑같이 말씀하셨고, 음악의 기회에 크고 작음은 없으며 어떤 연주도 허투루 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배웠다.
아마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내 성향에 맞는 분들이라 계속 인연을 유지했던 거겠지. 외국이라고 다 도 닦는 것처럼 음악 하는 건 아니다. 음악인도 교육자와 연주가 타입이 나뉘는데, 교육자 타입의 선생님들이 이런 태도의 측면을 많이 강조하셨던 것 같다. 연주가 타입 선생님들은 아무래도 좀 성취 지향적이고 결과물에 빨리 도달하려는 레슨이 많았어서 내가 크게 감동받지는 못했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 중에 기억에 많이 남는 학생도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약간 자폐 증상이 있었던 Y는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어 학습 능력에도 문제가 있었었다. 그런 학생을 끼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진짜 연주 직전까지 씨름을 했는데 연주를 딱 할 때는 마술처럼 훌륭하게 연주를 해내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 학생이다. 아 진짜 너무 힘든데 포기하지 않아서 이런 보람을 느끼는구나 하게 해 준 그런 학생들이 원래 잘하는 학생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음악을 너무 성취 지향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타입이 좋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으면 좋겠고, 원래 잘하는 것보다 전보다 점점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는 것이 훨씬 더 감동적이다. 내가 가장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의 성취는 그 학생 본인의 'best version'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며 이기는 것 이전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내는 것. 음악을 통해 성장해 본 경험을 한 사람은 음악 아닌 다른 일을 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음악 전공의 의미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전공을 해야만 이 정도로 몰입해 볼 수 있고, 그 경험을 통해서 음악 외적인 인생을 살아나갈 배움을 얻는 것.
중고생 레슨은 일단 다음 단계 입시 성과를 내는 게 우선이니까 차라리 역할이 단순한데 대학생, 대학원생의 레슨은 책임감이 더 많게 느껴진다. 음악 분야에 '진로'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건지. 좋은 학교 나올수록 포기하기만 어려워져서 더 곤란하지 않냐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대학교 교수님들은 그래서 학생들 진로 지도에 고민이 많으신데, 나는 대학교에서의 음악 전공에 대해 최근 새로운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음악 전공생들은 음악이 '좋으니까' 하는 것이다. 멀리 직업 전망까지 따져보며 전공을 택한 것이 아니다. (등 떠밀려 전공한 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하곤) 좋으니까 일단 더 해보고 싶어서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방 초음파 받으며 '죽을 때 죽더라도 학교는 마쳐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지금 음악이 하고 싶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대학생, 대학원생에게는 지금이 치열하고 순수하게 음악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전공을 하지 않으면 그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는 쉽지 않으니까. 학생들이 훗날 음악을 계속하고 있던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대학 시절 음악을 했던 것이 좋았다,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음악을 통해 인간을 생각하고, 음악을 통해 살아가는 연습을 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음악을 전공한다는 것이 아무 쓰잘데기도 없는 일은 아니다. 학생들이 그걸 깨닫고 지금의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순수한 음악의 본을 보이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나의 목표이다.
나도 학생들도 모두 시한부지만 (음악이나 명이나 다 끝은 있잖아) 작아도 온전한 내 세계 안에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