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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름 Feb 06. 2023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상처를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같은 아파트에 살던 A와 친해졌다. 같은 반이었기에 학교에서도, 집으로 가는 길에도 내내 함께였다. “오늘 시내로 놀러 가자.” 어느 날 종례 시간을 앞두고 A가 제안했다. 하지만, 그날 학원에 가야 했다. 엄마는 학원에 빠지는 걸 허락할 리 없었고, 거짓말을 했다간 바로 들켜서 혼이 날 터였다. “오늘은 안 돼.” 몇 번의 거절이 반복되고 나서였을까. A는 내 말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고, 가끔은 짜증을 냈다. 좋아하는 친구의 비위를 맞추려 문구점에서 과자를 사고, 그 애의 기분을 풀어주려 편지를 남겼다. 답장은 점점 짧아지더니 언제부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A가 다른 친구들에게 내 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데, 언젠가 A가 돌아오리라 막연히 믿었다.


체육수업을 앞두고 운동장으로 향했던 날,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두 줄로 나란히 선다, 실시!” A와 함께 나란히 서려는데, 이미 다른 아이 옆에 서 있다. 모른 체하는 A를 지나쳐 한 줄 한 줄 뒤로 걸어가다 깨달았다. ‘아, 우리 반 여자는 홀수라 누군가는 하나 남을 수밖에 없구나.’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였던 이십 초 남짓이 유난히 길었다. 내 팔을 끌어 제 옆으로 당겨 준 반장 덕분에 셋이서 걸어갈 수 있었지만, 앞뒤로 느껴지던 스산한 공기를 기억한다. 그때부터였을까.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진 것이.


매년 3월 1일이 되면 침대에 누워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언제든 내 옆에 있어 줄 단짝 하나와 쉬는 시간이면 서로에게 달려가는 게 당연한 친구들을 선물해 주세요.’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친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보내는 시끌벅적한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우리 반이었던 일진 B가 다른 일진들에 둘러싸여 울고 있는 걸 보았다. 딱 봐도 위로해 주는 게 아닌 추궁하는 모양새였다. ‘쟤네 친하지 않았나? 왜 저러지?’ B는 다른 일진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왕따가 되어버렸다. 늘 여유롭게 웃고 있던 그 애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옆에 있다가 괜히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냈다. 


한 달 정도 지났을까. 평소처럼 점심시간이 되자 급식실로 뛰어갔다. 친한 무리와 나란히 서 있다 보면 자연스레 옹기종기 같은 식탁에 모여 밥을 먹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친구들과 나 사이에서 줄이 똑 끊겨버렸다. 다음 테이블로 나와 함께 가려던 친구를 본 선생님은 단호히 막아섰다. “여기 앉아!”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B가 있었다. 


하필 가로로 두 자리만 있는 테이블에 B와 둘이 앉아있었다. 밥을 한 숟갈 뜰 때마다 다른 아이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쟤 B랑 같이 노는 거야?” 킥킥거리는 아이들도,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댄 아이들도 모두 나와 B의 관계성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얹고, 입으로 가져가는 내내 불편했다. 결국 망설이다 식판을 들고일어나 잔반통에 밥과 반찬을 한가득 쏟아버렸다. 몇 숟갈 뜨지 않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혼자 남겨질 B에게 미안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괜히 꾸역꾸역 앉아 밥을 먹다가 그 애의 친구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그렇게 B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내가 일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도 급식실을 나섰다는 걸,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눈물을 쏟아냈다는 사실을.


평소엔 잊고 있었던 A와 B가 가끔 기억의 문을 두드릴 때, A와 있었던 운동장의 외롭고 스산한 공기가 곁에 다가온 듯하다. 앞뒤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공허함에 헛헛해지기도 한다. 한때는 가까웠던 존재에게 버려지는 마음을 온몸으로 느꼈던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혼자이기를 두려워하는 불안의 근원일까 생각한다. 그러다 B를 생각하면,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진다. 이 정도면 제법 다정하다고, 나를 공격한 이에게 거칠게 반격했을지언정 다른 이를 먼저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고 자신만만하던 내 앞에 B가 비친다. 뜨거워진 낯빛, 부끄러운 도피를 들키기 싫어 숨고 싶어 진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찰나를 견디지 못하고 B를 두고 도망쳐버린 내가, 여전히 B의 기억에 남아 인간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있으면 어떡하지? B를 생각하면 A에게 상처받은 날 위로할 자격이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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