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행기
나는 향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니치향수 브랜드의 향을 섭렵한 것도 아니고, 향이 좋아 위스키를 즐긴다면서 현란한 향 표현은 미숙하기에 향 고수이자 덕후라고 이야긴 못하겠다. 그럼에도 다양한 향수를 시향하는 게 재밌고, 장소를 향으로 기억하는 것도 좋아해 작은 향수로 여행을 기념하는 편이다.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 마켓을 컨셉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드레스덴이랑 뉘른베르크야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워낙 유명하다고 하지만, 쾰른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도시 곳곳에서 열리기는 하지만 앞의 두 도시만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찾아갔던 이유는 샤워코롱이 기원이 쾰른에 있기 때문이었다. 4711 Eau de Cologne과 Farina 1709가 쾰른 샤워코롱의 원조를 위시하는 대표 매장이다(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독일 여행기에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그러다 문득, 향수는 프랑스에서 유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검색을 하던 중, 니스 인근에 Grasse라는, 세계 향수의 수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Grasse에는 Fragonard(프라고나르), Galimard(갈리마르), Molinard(몰리나르)라는 세 가지 브랜드가 가장 유명하다. 그중에서 Galimard를 선택한 이유는, 가격 부담 때문에 프라이빗 수업 대신 단체 수업을 택했지만, 단체 수업의 경우에도 소요 시간이 2시간 내외로 비교적 길고, 워크숍에서 내가 제작했던 향 그대로 향수, 바디워시 등을 주문제작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냉큼 결제했다.
마침 워크숍 시간은 오전 10시, 니스에서 8시 기차를 타면 9시 20분가량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기차역에 내려서 20분 정도 걸으면 갈리마르에 도착한다고 구글지도엔 나와있지만, 초행길이라 늦을까 연신 노심초사하던 내게 남편은 ‘무조건 지각 안 하게 할게. 나만 믿어!’라고 야심차게 말했다. 그래 남편, 믿는다.
그러나 프랑스 기차의 화장실을, 내 방광의 튼튼함까지 믿어선 안 되었다.
낮이면 따스하던 니스의 아침은 쌀쌀했다. 몸이 오슬오슬했지만, 기차를 타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는 와장창 깨졌다. 쓰레기가 뒹굴거리는 건 그렇다 치고 잠에 들려는데, 화장실에 가야 차분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장실 표시를 따라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참아보자!’ 하지만 내 방광은 도와주지 않았다. 앉아서 평온을 유지하기를 포기하고 기차 온 칸을 뒤졌다. 화장실 표시가 되어있는데 열리지 않았다. 보이는 버튼은 다 눌러도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순간 울고 싶어졌다.
하필 그라스역 도착 한 정거장 전 역, 기차문이 열리자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워 ‘으악’ 여린 비명을 내뱉었다. 위기를 감지한 남편은 캐리어 두 개를 한꺼번에 들더니 “내리자!”라고 말했다. 나는 역 안 화장실로 곧장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역 안에도 화장실이 없다.
이 정도가 되면 정말 길거리에서 소변을 눠야 하나, 그런데 요즘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게 일상인데, 벌건 대낮에 동양인 여자가 프랑스 시골에서 노상방뇨를 한다면 누군가 촬영해서 올리지 않을까. 그 영상이 내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남편이 아무리 전보다 편해졌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짧은 순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다행히 각종 위기 대응에 능숙한 남편이, “역에서 3분 거리에 빵집이 있어!”라고 외치며 뛰기 시작했다. 참으로 든든하고, 고마운데, 남편의 속도에 맞추지는 못하고 주춤주춤 따라갔다.
겨우 빵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봐도 화장실이 없어 보여 망연자실했다. 남편이 “엑스뀌제 무아, 우송 레 뜨왈레뜨 씰부플레?” (실례지만 화장실 있어요?) 라고 묻자, 파리해진 얼굴을 보고 위기를 직감한 점원은 직원용 화장실로 날 안내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해 준 고운 점원에게 “메흐시 보꾸!”를 연신 외치며, 빵 몇 개를 사고 그라스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워크숍 시작 전 여유 있게 도착했다. 200여 종이 넘는 향료를 보는 순간, 화장실 사건은 다 잊었다. 저 향을 모두 맡아볼 생각에 신이 났다. 한국에서도 향수 워크숍에 종종 참여했지만, 이렇게 다양한 향료가 눈앞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200여 종을 모두 시향하며, Base note, Heart Note (Middle Note), Top Note 순으로 각각 5~6종의 향료를 골랐다. Base Note는 내가 끌리는 향으로, Heart note는 Floral 한 뉘앙스로, Top note는 Citrus 한 결로 고르는 과정이 참으로 행복했다. 좋아하는 향들이 많아 몇 가지는 포기해야 했지만, 꿈꾸던 향수를 구현한 것 같아 기뻤다.
시내에서는 프라고나르와 몰리나르 매장에도 각각 들러 향수를 하나씩 샀다. 프라고나르는 그라스에서 가장 큰 향수 브랜드인 터라 옷도 소품도 함께 판매하는 등 상업화된 느낌이 짙었다. 향수에 진심이 아닌 것 같아 처음엔 프라고나르가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패키징이 밋밋하고 조금은 촌스러운 갈리마르에 비해 프라고나르의 디자인은 화려해 눈길이 갔다. 의심의 눈초리로 시향하던 내게, 프라고나라의 ‘그라스’ 향수는 정돈된 꽃향기의 따뜻함이 느껴져 놓칠 수 없었다. 몰리나르는 프라고나르와 갈리마르에 비해선 규모가 작은 듯했으나, 보랏빛 패키징이 이색적이어서 롤온 향수를 하나 샀다.
만일 그라스에 갈 예정인데 뚜벅이라면, 몰리나르에서 워크숍을 하는 것도 추천한다. 투어도 무료로 진행되고 워크숍 시간이 짧기는 하지만 기차역 바로 근처라 오고 가기 편하다. 그라스는 구글맵이 잘 통하지 않는 경사진 시골이기에 역 근처에 위치한 것이 엄청난 장점임을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그라스는 아름답지만 시골이기에, 구글 지도에서 안내된 대로 버스가 올 것이라 기대한다면 여행 일정이 꼬일 수 있다. 갈리마르 워크숍이 끝나고 기차역 근처로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었으나, 20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결국 우버를 불러 10분을 더 기다렸음에도 버스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구시가지가 경사가 급하고 도로가 좁아 차량 진입이 어려운 곳이 많다. 버스 대신 우버를 타고 일단 기차역 방면으로 가달라, 인근에서 식사할 곳이 보이면 내리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기사님은 "기차역에서 식당 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당신이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라고 말씀하셨다. 시내에 인접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일단 식사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구글지도는 먹통이었다. 구글이 안내한 대로 가면 주차장이 나왔고, 바위가 길을 막았다. 오죽하면, 프랑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차역 가는 길을 우리에게 물을 정도였으니… 결국엔 우버를 또 불러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만일 걸으며 헤맸다면 기차를 타지 못했을 것이다.
녹초가 되고 나니, ‘그라스에 괜히 가자고 했던 걸까?’ 싶고, 욕심을 앞세워 남편까지 고생하게 해 미안해졌다. 하지만 하루하루 내가 만든 향의 변화를 느끼는 설렘, 그리고 프라고나르의 그라스 향이 좋아 손목에 뿌리고선 킁킁대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남편도 향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에 괜히 뿌듯해진다.
만일 당신이 향덕후인데 프랑스에 간다면, 그라스에 가길 권한다. 단, 뚜벅이라면 각오는 하시라. 다만 고생한 만큼, 기억엔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