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과 조화
"생각해 보자. 과연 무엇이 최선일까?"
"어쩌면 좋을까? 안타까워."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밀어붙이는 거야!"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다.
머리형, 가슴형, 장형이라 구분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한 가지 속성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있을까?
날카로운 칼도 안전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그 날카로움을 제대로 쓸 수 있다.
모든 존재는 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물체에 빛이 비칠 때 빛을 받는 부분과 못 받는 부분으로 나뉜다.
빛을 받는 부분은 밝고 빛을 받지 못하는 부분은 어둡다.
이렇게 한 물체가 양면성을 가지게 된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두 가지 속성만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존재 자체에 양면성이 잇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된다.
물체는 물체일 뿐인데 거기에 빛이 비치면서 밝음과 어두움을 가지게 된다.
존재의 양면성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는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인데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속성이 달라 보인다.
보는 사람은 착각할 수 있는데, 자신이 보고 있음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진 대상에 집중하다 보니 자기가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순간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관찰 자체가 쌍방향인데 일방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 자체의 속성을 자신은 발견할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대상이 원래부터 그런 속성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사람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속성이 발견된다.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속성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가?
말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말한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람한테서 발견되는 속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다 다르다고만 하면 발견하고 연구하는 행위가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이다.
공통되는 것이 있고 서로 수긍하는 것이 있어야 발견하고 연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 된다.
사람이 어떠어떠하다는 설명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맺는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어야 그 설명이 가치 있다는 말이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더라도 종합해 보면 여러 사람이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사람의 특성을 구분할 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한 방향으로만 보면 한 면만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가 아닌 여러 개의 잣대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면서 그 대상을 제대로 알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놓고 보면 복잡해 보이는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기 쉬워진다.
한 면만 바라보면 흑백논리에 빠지기 쉽지만, 적어도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관찰해 보면 전체 윤곽을 볼 수 있게 된다.
사람이 보이는 행동 유형을 '머리형, 가슴형, 장형'으로 나누는 것은 다양한 이론과 전통에서 자주 발견된다.
인지, 정서, 행동이라는 세 방향으로 사람을 관찰할 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발견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머리형, 느낌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가슴형, 일단 직감대로 행동하고 보는 장형은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도 머리형은 논리의 정확성이나 내용의 타당성을 열심히 생각할 것이고, 가슴형은 글에서 느껴지는 느낌으로 더 읽을지 말지 결정할 것이며, 장형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하는 결론을 구할 것이다.
한 대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방향을 통합해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면 어느 한 가지 입장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사실에 가까운 알찬 정보를 많이 가질 수 있다.
자신의 성향을 살펴보고 인지나 정서나 행동의 어떤 면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은 중요하다.
어느 한 면으로 치우치면 균형을 잃고 조화가 깨진다.
하나를 두고 세 가지 방향으로 살펴본 결과들을 잘 통합하면 오해하고 착각하는데서 일어나는 혼란과 방황을 방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