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성찰법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 하루에 세 번 살피라는 말이다.
적어도 세 번은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인데, 왜 돌아보라고 할까?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도 경쟁에서 뒤처질 것만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데 말이다.
이 말은 옛날에만 효용가치가 있는 케케묵은 소리일 뿐일까?
속도와 효율이 중시되는 현대에 성찰은 쓸모가 있는 것일지 살펴봐야겠다.
먼저 반성(反省)이란 말부터 살피자.
말 그대로 풀어보면 '돌이켜 살핀다.'는 뜻이다.
그런데 "반성해!"라는 말을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듣게 되다 보니 반성이란 말과 잘못이 연합되어 '반성 = 잘못을 뉘우치다.'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명상 활동이 엉뚱하게도 체벌로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본래 반성이란 말의 의미는 아무 생각 없이 자동으로 바깥으로 향하는 의식의 흐름을 멈추고 방향을 돌려 내면을 살피라는 것이다.
반드시 어떤 잘못이나 실수가 있어서 책임을 묻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화가 나거나 억울할 때에도 반성을 하면 흥분한 감정의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림으로써 감정이 일어나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성찰(省察)이란 말도 살펴보자.
대충 보지 않고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자세히 보려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남의 일로 여기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하게 바라보지 않고 정성껏 살피는 것이다.
정성을 들여 살피다 보면 대충 볼 때 보이지 않던 것들도 발견되곤 한다.
흐르는 물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물속에 있는 자갈도 보이고 오가는 물고기도 보이며 나아가 물결의 흐름도 생생하게 보인다.
내면을 들여다볼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피기 시작하면 아주 작은 움직임도 느껴지게 된다.
정해진 잣대를 가지고 뻔한 답을 강요하며 바라다보는 것은 진정한 반성이 아니다.
답을 정해 놓고 정답에 자기 마음을 맞추어 가는 일은 자기를 학대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신념이나 주장을 억지로 마음에 쑤셔 넣고 자신을 몰아가는 일은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외부의 부당한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행위를 정당방위라 한다.
냉철하게 적용되는 법에서도 정당방위는 인정된다.
그런데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반성이 '자신을 몰아가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반성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제대로 반성하면 자책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책에서 벗어나게 된다.
본래 자책이란 것이 고정된 잣대에 맞추어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제대로 본다면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면서 최선의 대응책을 찾을 수 있다.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서 남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괴롭다.
고정관념이 허구임을 깨닫고 진실을 깨치는 순간 괴로움은 사라진다.
자책이든 원망이든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으로 볼 때 일어나는 마음이다.
차분하게 자신을 살펴보면서 고정관념을 발견하고 그 고정관념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순간 진실이 드러난다.
진실 속에서는 원망이나 자책이 설 자리를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