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기연 Feb 06. 2019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노동 가치설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

대학시절에 한동안 고민했던 주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가치로 여겨진다.

사람의 가치마저도 그의 수입에 따라 매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실제로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고 하니 혼란스러웠다.

과연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군사독재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기억은 그 자체로 혼란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기 앞가림만 하는 미숙함으로 보였다.

뒤틀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영달을 쫓는 행위는 그야말로 양심을 저버리는 더러움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한 몸 불살라서 민주화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도 뭔가 미심쩍었다.

과연 내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위에 참가했다가 지척에서 전경들과 맞닥뜨리는 순간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었다.

날아드는 곤봉에 맞는 것보다도 잡혀서 겪게 될 일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치면서 동시에 어마어마한 자괴감이 올라왔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시절에 불량배와 마주하며 느꼈던 공포와 자괴감을 또 느낀 것이다.

두려우면서도 화가 나는 심정!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혼란 그 자체이다.


부끄럽게도 시위에 참여한 경험은 그것이 유일했다.

졸업을 하며 교문을 나설 때 속으로 결심했다.

좌우 우도 아닌 중도를 찾겠노라고.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양쪽 극단을 넘어서서 모두를 살리는 길을 찾아서.


대학에 들어가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충격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나 자신의 정체감만큼 풀기 힘든 문제는 없었다.

나는 유산계급인가 무산계급인가?

나는 자본가인가 노동자인가?

당시 개인택시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를 두고 선배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문제를 파고들다 부딪힌 부분이 바로 '가치'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생산한 쌀을 팔아 농부가 받는 가격과 소비자가 그 쌀을 구입하는 가격은 다르다.

생산, 유통, 소비로 이뤄지는 경제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은 먹고 산다.

쌀을 생산한 농부와 소비자에게 갈 수 있게 유통하는 상인들과 일정 가격을 지불해서 쌀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쌀이라는 재화를 매개로 관계를 맺게 된다.

여기에서 '이 쌀의 가치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밥을 지어먹음으로써 목숨을 유지할 수 있으니 쌀의 가치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쌀의 가치는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농부의 땀과 노력이 없었다면 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쌀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비자가 구입할 수 있게끔 유통한 상인들이 없었다면 쌀은 식탁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쌀로 밥을 지어먹는 행위를 통해 쌀은 가치를 다한다고 볼 수 있으니 소비자 또한 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모든 재화에는 가치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밝힐 수 있을까?

이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관념의 영역이다.

자본에 가치를 두느냐 노동에서 가치를 찾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사실상 쌀은 자연이 키웠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활용해서 쌀을 쓰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공정성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가치를 자본에 둔다면 자본을 가진 자가 권리를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가치를 노동에 둔다면 땀 흘리며 노동한 자가 권리를 누려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노동마저도 돈으로 환산한다.

돈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닌데도 노동이나 아이디어와 엮이면서 엄청난 위력을 갖는다.

돈을 먹을 수는 없지만 돈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는 있다.


아무런 선입견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자면 가치라는 것은 맥락에 따라 변한다.

같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배가 고플 때와 배가 부를 때 그 가치가 달라진다.

한 재화에 담겨 있는 가치를 어느 하나의 요소로 재는 것은 불가하다.

가치의 뿌리가 노동이나 자본이냐 하는 논쟁은 세상을 양분해서 보려는 이분법일 뿐이다.

이분법으로는 참모습을 볼 수 없다.

차라리 관련된 모든 인연에 감사하면서 가치를 충분히 살려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을 물질로 보면 다만 몇 가지 요소가 결합된 존재일 뿐이다.

그 몇 가지 요소가 과연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할까?

어떤 존재의 가치는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 가치설도 자본 가치설도 존재의 가치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애써야 할 것은 최선의 맥락을 찾는 일이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헐벗은 자에게 옷을, 아픈 자에게 약을, 떠도는 자에게 안락한 집을 주는 것이 어떤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으로 쓰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까치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