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의 필요성
"평상심 시도(平常心是道)"
도(道)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이란 말이다.
웃고 울고 들뜨고 가라앉는 마음이 그대로 깨달음이란 말일까?
그렇지 않다.
평상심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마음이 어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가?
만약 아무 어려움 없이 마음속을 생중계하듯 말할 수 있다면 깨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면 마음이 어디엔가 팔려있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기보다 마음이 팔려 있는 상태로 지낸다.
그래서 "지금 마음이 어때요?"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평상심은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당신은 당신이 평소에 어떤 마음을 내고 있는지 아는가?
뜻밖에도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지 않은 채 마음은 이리저리 다닌다.
만약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그가 내는 마음을 살펴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도대체 이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대상을 보면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마음을 잘 붙잡고 있지 않으면 보는 대상에 따라서 마음이 옮겨 다니게 된다.
온갖 생각들이 장날처럼 북적거리며 혼잡하기 쉽다.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도 자꾸 변덕을 부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부 자극과 내면의 반응이 수시로 결합되면서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런데 왜 평상심이 도라고 할까?
평상심을 떠나서 도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를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보면 하나같이 이 소식을 전한다.
도는 평상심을 떠나서 있지 않다고.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옛날에 아주 부유한 사람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친구가 있었다.
부유한 친구는 가난한 친구의 사정이 딱해서 돕고 싶었지만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가난한 친구가 부자 친구네 집에서 잘 때 부자 친구는 꾀를 내어 값비싼 금덩이를 가난한 친구의 옷에 꿰매어 넣어주었다.
10년이 지나서 가난한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여전히 가난한 그를 보고 부자 친구가 물었다.
"10년 전에 내가 중 금덩이를 썼으면 가난을 면했을 텐데 어떻게 된 거냐?"
살펴보니 금은 그대로 가난한 친구의 옷 속에 들어있었다.
몸에 금덩이를 지니고 있어도 알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자기가 내고 있는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마음을 잘 쓸 수 없다.
평상심에 도가 다 있어도 관심을 다른 곳에 두고 있으면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늘 살피는 습관을 익혀두면 몸에 지닌 금덩이를 발견하듯 귀한 보배를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떻지?"라고 늘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