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견
몸을 진짜 나라고 믿는다.
극단으로 생각한다.
인과를 부정한다.
그릇된 것에 집착한다.
헛된 것에 집착한다.
이 다섯 가지 견해는 온갖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두 번째 어리석은 견해는 변견(邊見)이다.
어느 한 면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극단 사고를 말한다.
모든 사물에는 양면이 있기 마련인데 한 면만을 보고 그것을 전부인 줄 안다.
양면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순을 발견하지도 못 하고 온갖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빠지기 십상이다.
생각을 한쪽으로만 몰고 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런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초대되어서 식사를 했는데 너무 맛이 좋았다.
처음 본 음식이 아닌데 평소에 자기가 먹던 것과 맛이 달라서 물어보았더니 소금이란 것을 넣었단다.
이 사람은 집에 와서 소금을 구해다가 음식마다 많이 넣었다.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소금을 넣으면 맛있다.'는 생각에 빠져서 소금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사물의 단면을 보고 전부를 알았다고 착각하는 우화는 참 많다.
경험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경험에 압도되어 다른 면을 살필 여유를 잃었을 수도 있다.
어느 한 가지에 믿음이 생겨버리면 그 믿음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것도 치우친 견해에 사로잡히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도 이렇듯 전체를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극단으로 치우치는 어리석음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단견(短見)과 상견(常見)이다.
단견은 일반화를 하지 못하는 견해이고 상견은 지나치게 일반화를 하는 견해이다.
사과 하나와 사과 하나를 더하면 사과가 두 개가 된다.
그렇다면 배 하나와 배 하나를 더해서 배가 두 개가 되는 줄 알아야 할 텐데, 이렇게 응용을 하지 못 하는 것이 단견이다.
반대로 물방울도 더하면 사과처럼 개수가 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견이다.
단견에 빠지면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다.
하나의 경험에서 원리를 알아내어 여러 다른 상황에 적용할 줄 아는 것이 배움이다.
그런데 공통점을 찾아 일반화할 줄 모르니 경험이 그냥 그 경험으로 그치고 만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전혀 꿰매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견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거나 자신의 오류를 고치거나 다양성을 이해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거나 다투기 일쑤다.
상견에 빠지면 관념의 노예가 되기 쉽다.
한 두 번의 경험을 너무 일반화해서 늘 그렇다고 믿어버리기에 온갖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다.
실제 현실에서 겪는 경험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곤란할까.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사고방식을 신줏단지 모시듯 따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구태의연한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견에 빠진 사람들은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기 쉽다.
봄이 오면 두꺼운 옷을 벗고 가볍게 입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황이 변하면 변화에 발맞추어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
사시사철 두꺼운 옷만 고집하거나 가벼운 옷만 고집한다면 분제가 생긴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인데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사물의 양면을 두루 살펴서 극단에 치우치지 않게끔 조심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만다.
자신을 돌아보자.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잡아야 할 것을 잡고 놓아야 할 것을 놓는가.
진작 버려야 할 것을 아직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성급히 단정하는 일은 없는가.
혹시 극단 사고에 빠져 있다면 다른 쪽 극단도 살펴보아 균형을 잡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