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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기연 Oct 02. 2019

네 마음이 내 마음

용서의 미덕

"너의 죄를 사하노라."

누가 죄를 사할 수 있을까.

신? 왕? 판사?

마음이 짓고 마음이 갚는다.



상대가 사과하면 바로 받아주는 것이 좋을까.

내 마음에 앙금이 남아 있으면 사과를 받아주기 어렵다.

또한 너무 쉽게 받아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상대의 실수나 잘못을 용서하려면 내 속의 앙금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의 근대사에는 끔찍한 비극이 많았다.

구한말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리다가 나라를 잃었다.

36년간 지배를 받다가 해방이 되었으나 곧 전쟁이 터지고 분단되었다.

그런데 역사에 죄를 지은 자들이 스스로 용서를 받았다.


누가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용서했는가.

누가 탐관오리를 용서했는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처벌과 용서의 주체가 누구여야 할까.


아이를 유괴해서 죽인 자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이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마음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그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주인공은 분노에 휩싸인다.


개가 지나가던 사람을 물었다면 누가 피해를 보상해야 하는가.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을 신의 피조물이라 믿으면 자신을 용서할 권리가 신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피해자의 어머니한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행동은 제멋대로 하면서 책임은 자신이 지지 않는다.

마음대로 할 때는 자신이 주인이다.

책임을 져야 할 때는 신이 주인이 된다.

참 편리한 구조다.


용서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겁하게 신이라는 관념으로 도망칠 일이 아니다.

용서할 권리는 신한테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용서할 권리가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괴롭다.

이때 용서할 수 있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죄의식에 피해자를 입었기 때문이다.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용서는 '그러면 안돼'에서 '그럴 수도 있다'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공감대가 생겨야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진다.

'나라도 그렇게 실수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앙금이 녹는다.

대상이 상대든 자신이든 용서가 되는 순간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이 통하는 일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용서일 수 없다.

양심을 저버린 자는 용서받을 수도 없고 용서받아서도 안된다.

때로는 강력한 처벌이 진정한 용서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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