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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기연 Dec 18. 2018

인지부조화와 역설적 의도

교묘한 방편

"잘하려고 하지 말고 얼마나 긴장해서 버벅거리는지 살펴보세요. 일부러라도 더 많이 긴장해서 못난 모습을 보이면 다음 사람이 상대적으로 편하잖아요. 내가 잘 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편안한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니까 밑을 깔아주는 겁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던 내담자한테 권했던 말이다.

잘난 아버지의 일방적인 독선이 끔찍하게 싫었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가치관이 내사되어서 자신을 몰아가던 내담자는 이제 자신의 삶을 찾으면서 심리적으로 독립하고자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 내담자는 이 권유를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아주 오래전에 지방의 한 대학에 상담을 하러 나가던 적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검사 해석과 상담을 하러 다녔는데 그때 만났던 내담자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흥미검사와 적성검사를 했던 내담자는 검사 해석을 받으러 와서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적성검사는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흥미검사는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무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모양새였다.

상담을 권유했고, 내담자는 순순히 상담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당시 내담자가 신경정신과에 갔으면 중증 우울증이라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은 실패한 낙오자이며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통 한 회기나 두 회기 정도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는데, 이 친구는 무려 4회기에 걸쳐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다할 수 있을 정도로 사연도 많았고 말이 느리기도 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내담자의 아버지는 결혼을 세 번 했다.

내담자의 생모와 첫 번째 결혼을 했는데 아내의 행실을 문제 삼아 이혼을 하고 수녀와 결혼했다가 또 이혼하고 지금의 새어머니와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었다.

8살 터울의 배다른 동생이 태어났고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버지는 최고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자신과 동문이 아니면 아예 무시해버리는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배다른 동생이 공부를 잘해서 지방대를 다니는 내담자는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막상 내담자는 학점도 좋고 군대도 다녀왔으며 대학원을 진학하려는데 여러 교수들이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방대에 다니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사회에서 낙오한 것이며 자신은 쓸모가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두렵고 싫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가치관이 몸에 배어 있던 것이다.

내담자가 심리적으로 독립해서 아버지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끔 이끌고자 했다.

내담자한테는 신세계가 열리는 경험이었다.


처음에 언급한 이야기는 내담자가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내담자는 잘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하는 가치관을 갖고 싶어 했지만 이미 마음에 박혀버린 아버지의 차별 짓는 독선적 가치관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다.

갈등하는 내담자한테 경쟁이 아니라 어울리는 것이 목적임을 확실히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라고 제안했다.

내담자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제안을 받아들여 실제로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려 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자 여유가 생겨서 잠재력이 폭발한 것이다.

원래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내담자는 자기소개를 아주 유창하고 감동적으로 해서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어서 기분이 좋아진 내담자는 이후에 활발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말투도 달라지고 걸음걸이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연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을까?


내담자한테 적용한 기법은 '역설적 의도'라는 것이다.

긴장을 안 하려 하면 자꾸 더 긴장이 되기 마련인데, 역설적으로 더 긴장을 해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오히려 긴장이 풀린다.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긴장이 많이 된다고 마음을 개방하면 오히려 긴장도 풀리고 사람들의 호응도 얻는다.

역설적 의도를 사용하면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상과 벌이 의도와 다르게 적용되곤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원인을 내담자의 해석에서 찾았었다.

내담자가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지면서 보상 원리가 반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인지부조화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마음이 서로 부딪히는 현상이다.

이 상태에서 괴롭지 않으려면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갈등을 해소하려 한다.

눈에 뜨이는 드러난 결과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왜곡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역설적 의도가 효과를 보이는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긴장이 되고 떨리면 사람들한테 보이는 자신의 못난 모습이 두려워서 더 긴장을 하게 된다.

이때 역설적 의도로 아예 더 긴장을 해버리자 하고 마음을 먹으면 긴장하는 모습과 상황이 일치되면서 모순이 없어져서 긴장이 풀린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올까 긴장하기 마련이다.

이 긴장으로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크게 실패하게 될 확률이 커진다.

이럴 때 자신의 기대치를 바꾸어버리면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설적 의도는 충격요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지부조화로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왜곡시켜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구를 의도적으로 바꾸어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이이제이 전법'이라고 하겠다.

오랑캐를 오랑캐로 무찌르는 것처럼 역발상으로 긴장과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과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는 격언에서 보듯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된다.

역설적 의도는 과한 것을 더 과장해서 버릴 수 있게끔 하는 묘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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