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으면 주연, 눈 뜨면 조연
지인이 Daum에 내 글이 떠있다고 캡쳐해서 보내주셨다. 조회수 통계를 보니 어마어마하다. 소가 뒷걸음질치다 예쁜 쥐 한마리 잡았다. 구글링만 하는 내가 며칠전부터 Daum에서도 가끔 뭘 검색하고 있다. 속물같은 모습에 피식 웃게 된다. 그래.. 난 그냥 착한 속물일뿐이지 뭐!
내 또래 한국 아줌마들의 기본 스펙 중 하나가 체르니 30이다. 나 또한 어린시절 교회 반주 선생님이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져 한동안 열심히 쳤다. 패스트 러너(fast learner)로서 진도가 역시 남달랐지만, 음악적 소양은 부족해 스펙만 채우고 금새 흥미를 잃었다. 외려 빈 피아노를 기다리며 읽었던 소년중앙 만화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난롯가에서 양볼이 달아오른채 만화책을 넘기며 피아노가 더디게 비길 내심 바랬다. 그래도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에 다녔던 이력과 함께 내 인생에 예술이라는 것을 배웠던 짧았던 경험이라 소중하다.
음악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이유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음악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이유는 딱 하나다. 이들에겐 눈 동그랗게 치켜뜨고 자길 쳐다보는 사람들 앞에서 눈 감는 대담함이 허용된다는 점이다. 고개를 쳐들고 실눈을 뜨기도 한다. 음악에 몰입한 채 그 공간에 혼자만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청중을 위해 청중을 무시한다. 요즘 유센(Jussen)형제가 연주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뿔랑 Poulenc 작곡)를 자주 듣는다. 이들의 연주도 탁월하지만 어린 친구들이 손가락 뿐만 아니라 몸과 표정으로 연주한다. 이 비현실적 표정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너희들의 자신감은 어떻게 길러진거니? 모니터 앞에서만, 그나마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미간을 찌푸려야 겨우 집중할 수 있는 나같은 ISTJ는 절대로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연주를 마치면 엄청난 박수 갈채에 커튼콜까지 받는다. 강의는 아무리 잘해도 커튼콜을 받지는 못한다. 이것이 눈 감고 일하는 자와 눈 뜨고 일하는 자의 차이다.
눈 감고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
인간은 인지의 80%를 시각 정보로 처리한다. 눈을 뜨고 있으면 정보를 입력받느라 정신이 없다. 언어도 텍스트화해서 시각적으로 처리해버린다(전숙경, 2017). 그니까 눈을 뜨면 외부세계에만 집중해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주워 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남의 것을 너무 많이 보면 내 것을 못 만든다. 반면에 눈을 감으면 외부 신호를 차단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신호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안에서 자기만의 뭔가를 꺼내 보여주고 싶어지는데 그것이 자신감이다. 눈을 자주 감으면 자기 것을 최고로 표현할 수 있는 나름의 방식을 찾게 되는데, 이것이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산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정보의 입력보다 정보의 인출(표현)이 더 중요하다. 동일 내용을 반복적으로 읽고 외우는 것보다 한번 공부하고 한번 시험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것을 인출효과(또는 시험효과)라고 한다(Gates, 1917). 어느 정도 입력했으면 멈추고 장기기억에 잘 다듬어 넣어야 한다. 마트에서 잔뜩 장을 봐왔으면, 귀찮아도 포장을 뜯어 냉동, 냉장, 상온으로 구분해 정리하고, 어떤 것은 씻어서, 어떤 것은 흙 묻은 채 신문지에 싸두면 오랫동안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싫어했던 시험이 사실은 사온 식재료 꺼내서 순두부찌개든 샌드위치든 시간내에 맛있게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면 무슨 재료가 부족하고 넘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김밥을 캘리포니아롤스럽게 먹어보자고 야심차게 사둔 아보카도가 물컹해진 것도, 샌드위치에 없으면 아쉬운 토마토가 동이 났다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된다. 그니까 아이들이 장바구니 정리하기도 전에 또 다른 학원에 장보러 보내면 안된다. 전기세가 나가도 냉장고 문을 자주 열어 뭔가 만들어 보도록 하는게 중요하다. 마트에서 쓸데없는 것 사다 쟁여 놓는 것보다 훨 낫다.
정보 인출연습을 하려면 더 이상 읽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고, 그냥 눈 감고 방금 공부한 것을 말해보면 된다. 수학도 말로 할 수 있다. "제 생각엔,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할 때 직각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을 그려 붙이는 게 핵심인 것 같아요." 말 못하면 모르는 거다. 이때 음악하는 사람들처럼 감정을 같이 사용하면 좋다. 돈이 없어 궁색했던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의 빠바바밤... 빠바바밤.. 이 나오면, 이것은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빚쟁이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들으며 심장을 졸여야 한다. 부족한 외모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슈베르트의 네 손가락을 위한 환타지가 캐롤라인 백작부인을 짝사랑한 마음을 담은 곡이라는 것을 알고, 나란히 앉은 두 연주자의 네 손이 서로를 스칠 때 슈베르트의 그 애틋함을 느껴야 유센 형제의 표정이 나온다. 감정을 개입시켜 표현하기에 연주자들은 수많은 음표들을 머릿속에 넣고 가지고 놀 수 있다. 음악이 아닌 모든 지식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 만들었다. 현상을 설명해주고 싶을 때의 열망,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답답함.. 설명될 때 환희와 희열.. 이런 것들을 눈을 감고 느끼며 공부하자.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직각삼각형의 길이에 대한 것인데, 대부분 정사각형 넓이로 증명하네요. 이상하고, 신기해요!" 그 이유를 알아내면 이 아이는 죽기 전까지 피타고라스 정리 증명을 안 잊어버린다. 너무 작위적인가? 근데, 이거 학생 입에서 나온 말을 비슷하게 옮긴거다.
그동안 학습에서 '정서'나 '감정'의 역할은 과소평가 되거나 터부시되어 왔다. 감정을 통제해야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간의 불안, 긴장, 강박은 학습에 도움이 된다. 공부가 복잡한 내면세계의 질서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별히 환희, 기쁨, 행복과 같은 긍정적 정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새롭고 어려운 학습에 도전하게 한다. 인간은 긍정적 기분일 때 연관성이 낮고 연합되지 않은 기억들과 무의식을 꺼내 연결시키면서 순간적으로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는 직관을 발현할 수 있다(김보경, 2018). 노벨상 수상자들이 과학적 직관이 중요하다고 했는데(Merton, Fenshan, Chaiklin, 1994), 공부에 감정을 터부시한 우리 학습문화와 과학분야에 노벨상이 없는 것이 상당한 인과적 관계가 있다고 합리적 추론을 하게 된다.
엄마부터 눈감기
그 시절 동네 학원 선생님께 기대하긴 무리지만, 귀가 예민한 나에게 '보경아 눈 감고 이곡 한번 들어볼래' 를 해주셨다면... 체르니 40, 50, 쇼팽도 쳤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눈 똑바로 뜨고 쳤기 때문에 같은 키보드지만 음악이 아니라 글자가 나오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래도 가끔 멍 때리기도 하고, 영화나 독서로 딴짓도 하고, 눈감고 잠자는 것을 좋아한 덕에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좀 알면서 큰 것 같다.
남의 것을 너무 많이 보면 내 것이 안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눈 감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눈감고 연주하는 유센 형제들이 악보 보며 협주하는 대원들보다 빛나는 이유이다. 악보를 보면 굳은 표정밖에 안나온다. 눈 뜨면 지는 거다. 눈 감고 폼을 잡아야 주연이 된다. 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다가 혹은 음악을 듣다가 고개를 젖히고 종종 눈을 감아보자. 아니면 하늘에 대고 기도라도 하자. 노안이 시작된 뻑뻑한 안구 때문이라도 좋다. 눈을 감아보자. 유센 형제, 가수 이적, 마리아 여사 흉내를 내면서. 그러면 아이들도 엄마를 흉내내어 깜깜한 자신의 내면에서 작은 불빛을 찾아내 보여줄 때가 있다.
첫째 아이가 영어책을 가지고 와서 내 앞에서 서툴지만 연극하듯이 귀엽게 읽는다. 아이가 안 시키는 것을 할 때 엄마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들어본다. 틀렸다고 중간에 끼어들면 안된다. 연주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너의 목소리가 너무 감미롭다.", "너가 beautiful을 영국식으로 발음할 때 기분이 좋았어!" 라고 말해준다. 음... 그런데, 이것 진심이다. 그러면, 아이는 더 이상 책을 보지 않고 이상한 말들을 문법 다 틀려가면서 쏟아낸다. 아이가 악보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내부 신호에 주파수를 맞추는 때다. 이때 커튼콜 박수를 준비해야 한다. 커튼콜 좀 지루해도 참아야 한다. 내 아이를 자기 인생의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안 만들려면. 감정을 통제한 성실한 아이보다 엉뚱한 상상력을 가진 아이를 더 칭찬(Mártin, 2019)해야 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아이야, 눈 뜨면 지는거야! 공부가 예술이 되는 그날까지.
참고자료
* 전숙경(2017). 미디어는 교육을 어떻게 바꾸었나.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 김보경(2018). 직관적 사고의 교육적 의의와 교수설계에의 시사점. 교육공학연구, 34(3), 617-948.
* Mártin, D. (2019). Habitus: Sind Sie bereit für den Sprung nach ganz oben? 배명자 역(2020). 아비스투 -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파주: 다산북스.
* Astleitner, H. (2000). Designing emotionally sound instruction: The FEASP - approach. Instructional Science, 28, 169-198.
* Gates, A. I. (1917). Experiments as the relative efficiency of men and women in memory & reasoning. Psychological Review, 24(2), 139-146.
* Marton, F., Fensham, P., & Chaiklin, S. (1994). A Nobel’s eye view of scientific intuition: discussions with the Nobel prize-winners in physics, chemistry and medicine(1970-1986). International Journal of Science Education, 16(4), 457-473.
* YouTube WDR-Klassick 채널 - 뿔랑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 Poulenc Concert to for 2 Pianos and Orchedstra in D Minor, FP. 61
* YouTube KBS Kpop 채널 - 이적X김진표 - 돌팔매 [유희열 없는 스케치북] https://youtu.be/0EpUjoqBlQ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