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하루에 네 가지만 하기]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방에서

교수님의 주간일정표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돼 지도교수님께서 상담을 하자고 하셨다. 1995년 우리와 같이 대학에 오신 젊고 유능하신 교수님은 항상 빠른 걸음으로 다니셨는데, 그날도 바쁘신지 연구실에서 잠깐 기다리라 하시고 학과 사무실로 급히 가셨다. 연구실 구석구석을 살피다 테이블 위에 던져져 있는 A4용지에 눈길이 갔다. 유심히 보니 주간일정표였다. 교수님의 유능함을 증명하듯 많은 일정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순간 내 손에 어떤 일정표도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교수님과 나눈 대화는 전혀 기억에 없다. 오로지 내 관심은 A4 가로 인쇄 주간일정표였다. 삶으로 가르친 것만 남는다고, 교수님의 일정표는 아직도 나의 장기기억에서 터줏대감 노릇 중이다.

그즈음 스티븐 코비 박사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히트 치며 우리나라 자기계발서 시장에 붐이 일었다. 진로가 결정되어 있는 사범대생에게 성공의 의미가 뭔지도 모른 채 도서관의 자기계발 코너를 서성이며 다양한 시간관리 책들을 읽고 적용해보았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보니 머릿속에 돈 계산보다 시간 계산을 먼저 한다. 외식하고 남은 음식을 포장하는 것은 내가 이 비슷한 것을 내 주방에서 만들어내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남은 음식 안에는 셰프가 그만한 조리 실력을 갖추기 위해 뜨거운 불 앞에서 견딘 인고의 세월이 녹아져 있다. 가족이 생기니 집안일의 다양성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많아진 일보다는 집안을 정리하느라 내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조금씩 일찍 일어나다 보니 어느덧 하루에 4시를 두 번씩 살게 되었다.

좋은 분과 중식당에서 즐거운 식사를 하고 남은 광동식 볶음밥과 소고기는 이틀 후에 먹어도 맛있었으니, 요리사의 시간을 좋은 가격에 잘 산 것 같다.


정체성 혼돈의 시기

자기계발서나 시간관리 서적 작가들의 대부분은 전업 아내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장이다. 최근에는 유튜브 때문인지 젊은 친구들이 나처럼 살아보라면서 자기계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100세 시대 한 인간이 스스로 평가되려면 절반 이상은 살아봐야 하지 않나? 게다가 이들에게 자기계발을 방해하는 존재는 자신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직장맘의 고민은 차원이 다르다.

진행하던 과제 종료가 3개월 남았으니 정산할 서류가 있으면 서두르라는 협박성? 문자가 왔다. 과제를 들여다 본지 한참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는데, 곧이어 집앞 정육점에서 김장 맞이 수육용 고기 세일을 한다는 친절한 문자가 왔다. 곧바로 스팸 처리했더라지만, 나는 이미 봐버렸고, 내일은 김장하는 날이다. 문제는 입 짧은 딸이 그나마 수육은 먹는다는 점이다. 나에게 뭐가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인지 갑자기 혼란스럽다. 이러한 혼란은 정체성 혼돈으로 이어진다. 진한 락스향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 물때를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다가 갑자기 내가 쓰고 있던 논문과 욕실 청소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직 만물에 도통을 못해서인지 어떠한 내용적 연결고리도 찾기 힘들자 개인적 저어함이 엄습해 온다. 당장 청소솔을 집어던지고, 노트북을 열어 쓰고 있던 논문의 가장 최신 버전 파일명에 보름 전 날짜가 붙어있는 것을 자책하며 모니터로 목을 빼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때 낀 욕실 바닥을 째려보며 참는 것, 논문 투고를 미루는 것. 어떤 게 더 견딜만한가 생각해 본다.

정육점에서 세일 전 가격을 안 알려주셔서, 아쉽지만 수육은 안 먹는 것으로.


4개의 시간의 방

깔끔하고 신속한 업무 처리와 입 짧은 아이의 입맛을 사로잡는 일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우선순위 방식에선 더 매력적인 것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게 된다. 낮은 랭킹에 대해서는 후폭풍을 각오해야 한다. 직장일로 자신을 돌보지 않아 말년이 불행하신 분들을 종종 본다. 딸 아이의 체력이 부족하다 생각될 때마다 책임감의 거리에서 죄책감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는 것을 애써 모른 체해야 할지도.. 우린 우선순위를 주기적으로 바꾸며 100세까지 내가 누구인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우선순위 방식을 써도 흐르는 세월 앞에 마음의 분주함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소소한 갈등과 조급함을 수없이 직면하며 분석하고 고민한 결과 내가 찾은 방법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이다. 즉 하루를 몇 개의 공간으로 만들어 시간을 흐르지 못하게 한 후, 그 안에 할 일들을 담아낸다. 그래서 나에게 4개의 시간의 방이 있다.


1번) 새벽 루틴의 방 | 나를 위한 비밀스럽고 소중한 일들. 90년대 브래드 피트의 영어를 감상하고, 미학적 취향을 높인다. 눈을 감고 묵상하며 창조적 구상을 한다. 이 방엔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2번) 딥 워크의 방 | 나와 조직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집중해야 하는 일들로 2-3가지 이내. 보고서나 강의(준비), 중요한 회의, 글쓰기 등. 이 방의 시건장치는 좀 비싼 것으로.

3번) To do list 방 | 가벼운 미팅, 결재, 서류 행위, 카톡, 업무 등 멀티로 해결하거나 미뤄도 되는 일들.  이 방엔 사람들로 북적인다.

4번) 저녁루틴의 방 | 아이들과 뒹굴뒹굴 노닥거리면서 식사, 정리, 대화, 놀기 등. 이 시간엔 의자에 앉지 말기. 책도 누워서 보기. 누운 자세에선 맘도 너그럽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아 이 방에서 엄마를 맘껏 누려라. 다만 너희들이 원한다면.


1, 4번 방에서 루틴을 반복하면 십수 가지의 일들이 하나의 연속동작으로 진행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새벽엔 자신에게 솔직하고 창조적이다. 정신과 육체, 수천 년 전 글과 신간의 글, 기계적인 일과 창조적인 일들이 교차로 진행된다. 거울 앞에서 몸의 군살을, 눈 감고는 영혼의 군살을 확인하다. 그러다 보면 이 둘의 경계가 사라지며 모두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시작하기 싫은 일은 1번 방에 순번만 잘 매겨서 놓아두면 이루어지는 마법을 보게 될 것이다. 하루 중 2번 딥 워크의 방만 잘 보내면 된다. 물론 이 시간에 예상치 못한 잡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큰 원칙 안의 작은 예외들은 귀엽다. 이렇게 정리하면 루틴 두개(1,4번방), 딥 워크 두가지(2번방), 하루에 네 가지만 하면 된다.

각방에서 3-4시간씩 있다가 나오는데, 방에서 나올 때 미련이 남아도 옆방으로 시간이 흘러가지 않도록 가급적 문을 꼭 닫는다. 빨래가 높이 쌓였더라도 빨래를 영혼의 정화로 의미부여 하지 않는 한 1, 2번 방에서 세탁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아이의 손톱에 까만 때가 보여도 4번 방이 있으므로 긴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시간은 나를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일종의 멈춘 공간 또는 방과 같다.

폐쇄된 곳을 좋아하지 않아 겨울에도 창문을 조금 열어 공기를 흐르게 한다. 그래도 시간의 방문은 꼭 닫자.


아이들에게 1번 방을 만들어 주자

교육에서 학습동기(motivation)가 중요하다고 하나, 나는 동기에 의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마음을 너무 믿지 말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동기부여하는 말에도 혹하지 마라. 공부는 식사나 잠처럼 습관이나 루틴으로 평생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1번 방을 만들어 주라. 솔직하고 창조적이고 잔머리를 안 굴리는 그 시간에 수학, 과학, 언어, 독서, 미술, 운동, 무슨 공부를 하든 곧 실력이 될 것이다. 공부가 습관이 되면 공부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 고3이 돼도 유세를 안 떤다. 다른 일 하지 말고 밤늦게까지 공부만 하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인스턴트와 배달음식으로 야식과 폭식을 권하는 것과 다름없다. 남이 정한 입맛에 길드는 낮은 수준의 공부밖에 못한다. 우리 모두 학창시절 야자의 DNA를 아이들에게 대물림하지 말길. 학교란 자율학습이라 부르고 타율학습을 가르치는 곳이다. 어쩔 수 없다. 학교의 사회적 기능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집에서 1번 방을 만들게 하여 학교교육과 밸런싱을 맞춰주어야 한다.  


아인슈타인, 고마워요.

시간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준으로 한 크로노스(chronos)와  주관적 의미가 부여된 마음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대부분의 시간관리 기법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존재가 의미를 부여한 공간이며, 그곳에서 그 의미들의 보호받으면서 일하는 카이로스로 여겨질 때 내게 시간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바쁨과 조급함의 밧줄이 내 목을 죈다.

시간은 공간에 독립적일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 고등학교 물리 I 교육과정에 포함된 것에 박수를 보낸다. 난 뉴턴밖에 못배워 시공간의 의존성을 이제야 깨달았다.* 공간이 x, y, z의 3차원이라면 시간은 최소 5차원 이상의 지표로 표현되어야 한다.

가끔 시간의 방에서 딴짓을 해도 된다. 방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정하였기에 가끔씩 일어나는 딴짓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시간의 방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각 방마다 서로 다른 이름의 시간이 공기처럼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죽음의 목전에서도 내 마음은 지금처럼 모든 것이 서툰 20대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테니. 그러니 그때도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거다. 우리 하루에 딱 네 개만 잘하고 살자. 세 개면 더 좋고.

대학동기와 스페인 여행 후 코로나 핑계로  여권 갱신을 미루던 차, 이번엔 고맙게도 이탈리아라며 돈 독촉을 한다. 기쁜 맘으로 3번Todolist 방에 던져둔 여권을 찾아봐야겠다.


참고문헌

김상욱(2018). 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동아시아.

박혜란(2019).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 박혜란의 세 아들 이야기(제4판). 나무를 심는 사람들.

파멜라 드러커맨(2003). 프랑스 아이처럼. 북하이브.

하상우(2018). 2009 및 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물리교과서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한 서술 분석. 새물리, 68(10), 1067-1080.

Ecclesiastes, Chapter 3.


* 사실 고3 물리II 시간에 훌륭하신 물리 선생님께서 상대성이론을 살짝 설명해주셨다. 음악시간에 비틀즈를 부르게 하신 선생님과 함께 교과서에 안 나오는 것도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작가의 이전글 눈 뜨면 지는 거야, 공부가 예술이 되는 그날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