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 밀리고
방학을 맞아 제주 할아버지댁에 내려간 아이가 전화를 빌려 문자를 보낸다.
"엄마, 수호예요. 보고 싶어요. 영상 통화해요."
"나도 수호 보고 싶어. 빨리 전화 걸어줄래?"
페이스톡 속 탐스런 볼, 웃을 때 딱 달라붙은 눈이 너무 사랑스럽다.
"엄마, 지금 어디예요?"
"응? 집이지 뭐..."
전화받자마자 내 위치부터 추적하는 것은 자신이 키우는 개구리가 보고 싶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나, 개구리에게 밀렸다.
나도 설을 보내러 뒤따라 제주로 향했다. 나흘 연휴 중 첫날 저녁 늦게 도착해서 마지막 날 일찍 돌아오는 일정을 짜보았다. 표면상 나흘이지만, 이틀 일정이다. 속보인다.
제주는 올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동네 구경도 할 겸, 이른 아침 산책을 하다 새로 생긴 폴 바셋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갔다. 이 동네 주민처럼 자연스럽게 커피를 시킨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머그잔을 받아 들고 이층 창가에 자리를 잡자마자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룽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시댁을 떠올릴 때, 띵동하면 철커덕 열리는 철문, 푸른 잔디 마당의 귤 나무, 80년대 유행했던 불란서풍 2층 양옥 주택*, 거실을 지키는 큼지막한 달마도를 대체할 것이 생기나 보다. 저 멀리 구름에 가린 한라산을 바라보며, 시댁이 제주도라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제주와 시댁, 폴 바셋에 밀렸다.
사랑하는 능력, 연결하는 능력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지만, 좋아하는 감정없이 무슨 수로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지... 들을 때 마다 남 이야기로 흘려 듣곤 했다. 말로 글로 아무때나 내 인생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모호함과 추상성의 구체화를 시도한 것은 십 년도 채 안 된 것 같다. 내가 담아내기에 너무 광대하고 숭고한 이것을 내 수준에 맞게 조금 축소하여,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정의내린 것이 '연결'이었다. 사랑하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자 한다.
사랑이 연결이라면 사랑은 감정이라기 보다 전략이 필요한 능력이라 하겠다. 대상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면 delete키를 누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옆으로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자. 그 옆에 존재하는 것과는 연결되고 싶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원래의 것과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그 옆에 가만히 서있어 봄으로써 대상과 나의 상관계수를 높일 수 있다.
내 방에 개구리를 모시고 있기에 아이가 나와 연결되기 원한다. 시댁 옆에 폴 바셋이 있음을 알자 제주에서 나만 먼저 돌아오는 일정을 하루쯤 미뤄볼까 잠시 망설이게 된다. 구름 걷힌 한라산을 보며 한 시간 정도 룽고를 마실 수 있을까 해서다. 사랑은 조금씩 밀고 밀리는 전략을 통해 연결을 지속하는 능력이다.
공부, 사랑받은 아이가 유리한 게임
무엇인가를 배우고 공부한다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소유가 미덕인 시대를 살았던 우리는 교과서의 정보를 잘 가공해서 장기기억에 많이 저장하고 필요할 때 혼자 꺼내 쓰면 됐다. 이젠 공유와 연결이 가치를 창조한다. 아이들은 내부에 핵심지식(core concepts)*만 지니면 되고, 나머진 구글에서 찾으면 된다. 중요한 건 머릿속의 지식과 외부지식을 연결하는 능력인데, 이때 학생이 체득한 핵심지식과 연결의 상태가 학습의 질을 결정한다. 핵심지식의 전이력이 높을수록, 연결이 광범위하고 촘촘할수록 공부를 잘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을 연결짓는 것이 공부라면, 사랑과 공부는 매우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교육학에서는 학습을 유의미하게 지속시키는 이 전략을 관련성 전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기분 좋은 연결됨을 많이 경험한 아이가 연결주의 학습에선 매우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친구를 후원하며 가끔 손 편지를 주고받는 아이는 어린시절부터 지구적 연결을 경험한다. 아프리카랑 나랑 뭔 상관? 이라고 거절하는 아이는 사랑보다 거절감을 더 많이 경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아무리 소중한 것을 가르쳐도 자신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아니 시험과만 연결시키니까 시험이 끝나면 연결도 놓아버린다.
딸 아이가 30호 가수 이승윤씨의 소우주를 몇번이고 듣더니 금새 그림을 그려온다. 마이크 대신 펜을 들고 가수가 된듯 패드를 무대삼아 노래의 메시지를 표현해 본다. 노래와 그림이라는 서로 다른 맥락을 오가며 새로운 연결을 지어보는 공부를 하고 있다(cross-contextual curriculum).
너와 나 사이 기분좋은 연결이 많을수록 오래도록 사랑을 지속할 수 있다. 싫어하는 게 많으면 공부도 인생도 불리하다. 정확한 연결보다는 조금 비켜가도 촘촘한 연결이 더 좋겠다. 엄마가 개구리를 너무 싫어하지만 않으면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공부도 잘할 수 있게 된다니, 아이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처럼 좋은 덕담도 없겠다.
*불란서풍 2층 양옥 주택: 실제로 프랑스풍은 아니고 프랑스 제국주의 시절 지배했던 인도차이나 반도 등에서 유행했던 도시 주택 양식. 70-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로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핵심지식: 이게 뭔지 나중에 꼭 쉬운 말로 써보고 싶다
참고자료
김도헌(2020).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시대의 미래 학습,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연결, 확장, 정서의 개념을 중심으로. 평생학습사회, 6(1), 1-25.
전숙경(2016). 초연결사회의 인간 이해와 교육의 방향성 탐색. 교육의 이론과 실천, 21(2), 55-80.
Keller, J.M. (1987). Development and use of the ARCS model of instructional design. Journal of Instructional Development 10, 2. https://doi.org/10.1007/BF02905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