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
'앙금택목(良禽擇木)'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는 뜻으로, 자기 재능을 알아주고 잘 지원해 줄 사람을 후원자로 선택해야 현명하다는 의미이다. 사업을 준비하는 나의 친구는 내게 이 말을 꺼내면서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고사성어의 의미대로 좋은 파트너가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러한 기회가 오길 바라고 기다리기만 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본인 스스로가 다른 이에게 좋은 나무의 둥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분명 누군가도 자신의 덕목을 알아채어 좋은 나무의 둥지가 되어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겠냐 하는 것이었다. 친구는 이 말을 마치고서는 사업의 처음 시작부터 이러한 파트너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이란 원래 이러한 '뮤즈'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이 아니겠냐며 호탕한 웃음소리로 말하였다. 그의 눈빛은 모험을 앞두고 의지가 불타오르는 만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친구는 사업의 의미로 이 말을 꺼낸 것이지만 어떤 것이든 항상 사랑과 직결된 의미로 받아들이는 애정결핍증 환자인 나로선 새로운 생각에 눈을 뜨게 되고 만다. 뮤즈라니... 너무 낭만적인걸?
그 무렵엔 뮤즈를 사랑의 대상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물론 뮤즈가 비유적인 의미로는 사랑의 영감이 될 수 있는 것도 맞지만 뮤즈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뮤즈, 예술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물체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정해진 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감을 일으키는 방식도 창작자와 뮤즈와의 관계에 따라 제각각 달랐다고 한다. 사랑이란 아름다운 관계에서 영감이 꽃피우기도 하고 뮤즈가 창작자에게 혹독한 시련을 부여해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고.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독려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서 영감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왔던 사랑들은 아쉽게도 뮤즈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나무이자 좋은 새가 되어주지 못해 떠났다. 사랑했지만 각자의 입장이 서로 달라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이 되어주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뮤즈를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 점점 잊혀 갈 무렵, 내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시와 글을 쓰는 것. 이때 처음으로 다시 한번 뮤즈가 있었으면 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모든 예술 창작 활동에 있어서 영감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당시에 나는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 낭만파 시를 접하며 시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나는 낭만파 시의 역작이자 불멸의 작품, 에드거 앨런 포의 <갈까마귀(The Raven)>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뮤즈는 바로 작품의 제목 자체인 '갈까마귀'였다. 갈까마귀는 그를 잔혹하게 쪼아대서 작품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뮤즈에 의해 탄생된 전설적인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의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도 한 작품이다. 작품 내에서 그는 사랑하는 연인의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할 때 갈까마귀는 그 유명한 구절인 "Nevermore"를 반복하며 그를 절망시킨다. 낭만파 시인이던 에드거 앨런 포는 실제로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이 병으로 인해(실제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생사를 오갈 때조차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으로 본 시를 통해서는 갈까마귀라는 장치를 통해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결국 그조차도 차가운 현실에 무릎 꿇고 낭만을 저버린 것이다. 차가운 현실이 그를 쪼아대는 갈까마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차가운 현실 뿐이었다.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낭만 사이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던 내가 차가운 현실에 굴복한 모습이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 날 이후로 나의 시는 철저히 갈까마귀의 깃털처럼 까만색이었다. 나의 아픔을 승화시키니 수많은 영감이 넘쳐흘러 많은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흰 종이를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에게 뮤즈는 '갈까마귀'라면 내게 뮤즈는 '까만 종이'였다.
에드거 앨런 포는 사랑했던 연인이 죽고 나서 다시 회복했을까? 사실 그의 일생에 대해서 나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없다. 회복하든 말든 그는 그이고 나는 나니까. 그래도 나는 시간이 약이었는지 아픔도 기쁨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무렵 나의 종이는 흰 여백이 남아있지 않을 만큼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계속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까만 종이 위에 까만 글씨를 쓸 수 없었다. 까만 종이 위에 쓸 수 있는 글씨는 하얀 '사랑' 뿐이었다.
이별 뒤에 새 사랑이 찾아오고 차가운 바람 뒤에 뜨거운 온기가 찾아오는 것처럼 내겐 전혀 다른 색깔의 뮤즈가 찾아와야만 다음 시를 노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새로운 뮤즈가 나타나길 기원했다. 대신 이번에는 뮤즈를 사랑이란 목적을 위해 필요한 대상으로 찾지 않으려 했다. 왜냐면 뮤즈는 사랑에 대해서만 영감을 불러일으켜주는 것은 아니니까. 나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뮤즈니까. 만일 나의 새로운 뮤즈를 만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사랑도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분명 까만 종이 위에 쓰일 하얀 사랑이라 믿는다. 나의 새로운 뮤즈는 '까만 종이 위 하얀 사랑'이다.
새로운 사랑은 뮤즈를 찾아 떠나는 낭만 가득한 모험의 여정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나무, 좋은 새가 되고 싶다.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할 것이다. 만일 서로가 서로에게 뮤즈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나의 뮤즈가 되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