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

by 깜지

꿈처럼 두루뭉실한 단어가 또 있을까? 어떨 때는 잠을 잘 때 꾸는 것을 꿈이라고 할 때가 있고 또 어떨 때는 미래를 꾸는 것을 꿈이라 하기도 한다. 같은 단어인데도 자기 멋대로 이랬다 저랬다 뜻을 바꾸곤 한다. 한술 더 떠서 누군가에게 '너의 꿈은 뭐야?'라고 물으면 답도 제각각이다.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갖고 싶은 무언가가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목표나 결과만이 꿈이 아닌 이상적인 가치나 비전을 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꿈이 장래희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어린 시절 모두가 한 번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꿈을 적는 칸에 장래희망을 쓰고선 '나의 꿈은 무엇 무엇(직업)입니다'라고 발표하곤 했다. 그런 나의 어린 시절 꿈은 고고학자였다. 많은 아이들이 다양한 장래희망을 꿈꾸지만 고고학자는 어쩌면 어린 나이에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법한 직업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만화 빼면 시체인 이 몸에게서 꿈 역시 만화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섭섭할 정도. 어렸을 때, '재키찬 어드벤처'라는 만화영화를 보았다. 홍콩 배우 성룡을 실제 모델로 한 미국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작중 주인공인 재키찬이 고고학자였다. 그는 많은 유적지를 모험하며 보물을 찾고 악당들을 물리쳤다. 나는 그의 모습을 동경해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다. 물론 내 상상 속 고고학자는 학자라기보다는 모험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정확히 어떤 직업인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지 못했어도 어린 시절 내게는 그런 사정 따위 중요치 않았다. 그저 멋있어 보이는 재키찬의 모습만이 아른거렸고 그 이유면 충분했다. 만화 속 주인공이면 무엇이든지 따라 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깃든 꿈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꿈을 비웃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학창 시절,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떤 책의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간략히 이야기해 보면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너의 꿈은 무엇이냐 물어본다. 아이는 장래희망을 말하며 그것이 꿈이라 말한다. 그러자 어른은 무언가 되고 싶은 것은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꿈은 장래희망이 전부가 아닌 그보다 더 이상의 미래와 가치를 품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나는 책의 내용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마치 내가 꾸고 있던 꿈은 별거 아닌 것처럼 얘기했기 때문에 나의 꿈이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꿈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주지도 않으면서 그저 꿈은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니 더 위대하고 거창한 미래를 그리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으로는 그러면 내가 되고 싶은 장래희망은 꿈 축에 끼지도 못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니 분노에 차올랐다. 나의 이런 분노를 세상이 외면하는 건지 정작 당시에는 선생님이나 부모님도 꿈이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어른들도 정확히 꿈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면서 왜 어린 시절의 꿈에 대해서는 존중해주지 않는 걸까 하는 적개심만 늘어날 뿐이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나이만 어른이지만) 그때의 어른들에게 더 이상 나쁜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꿈이란 무엇인지 어른들도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도 어린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아쉽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나 역시 꿈과 장래희망을 분리하게 되었다. 세상을 배우고 경험하면서 차츰 현실을 깨닫다 보니 현실은 내게 선택 가능한 선택지에게만 손을 들어주었다. 고고학자를 꿈꿨던 어린 시절의 순수한 희망을 잃게 하여 고고학자가 되기 위한 모험을 선택하기보다는(어른들의 만류도 있었다) 나의 성적과 현실적인 상황에 맞춰 선택 가능한 진로만을 선택한 나 자신만 남아있었다. 모든 선택의 몫은 나 자신이란 걸 알기 때문에 후회는 없지만 그때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장래희망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다행히도 나는 금방 두 번째 꿈을 꾸게 되었다. 고고학자라는 꿈을 포기하여 공부를 하는 목적과 방향을 잃은 내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준 두 번째 꿈은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웹툰 '화이트레이디'를 보고 나서 웹툰의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나는 만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이나 진로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캠퍼스 로맨스는 다른 의미로 내게 다시 한번 펜을 쥘 이유를 선사했다.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웹툰으로 본 사랑이 전부였던 두루뭉실한 꿈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아주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어쩌면 책에서 말한 꿈이란 것은 이러한 이상적 가치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내린 답변은 이때부터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두 번째 꿈에 실패했다. 첫사랑을 캠퍼스 로맨스로 할 수 있게 되어 꿈을 이루었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로맨스 소설 대부분은 사랑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지만 인생이란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나 만화가 아니었다. 현실을 배제하고 낭만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사랑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되 발은 땅에 붙어 있어야 했지만 나의 이기적인 낭만은 첫사랑에게 날개를 선물한 것이 아닌 그녀를 절벽 끝으로 내몰 뿐이었다. 내가 꿈꿔온 사랑은 로맨틱한 사랑이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반대로 낭만을 잊고 현실만을 쫒을수록 더 많은 문제들이 더 격렬하게 사랑을 가로막았다. 현실이 서서히 사랑을 비켜가게끔 믿고 기다려야 했는데 내 손으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는데만 집중하다 보니 그녀가 점점 안개처럼 희미해지는 중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와 그녀의 여정에는 천천히 하루를 보내며 기다려야 찾아오는 노을빛 낭만이 없었다. 낭만이 없는 사랑은 빈 껍데기 같은 공허한 사랑뿐이었다. 사랑은 차가운 현실도 뜨거운 낭만도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오랜 자책 끝에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첫 번째 꿈은 내가 스스로 포기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금방 새로운 꿈을 찾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실패는 다른 이야기였다. 실패는 더 이상 나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들지 않았다. 꿈은 어차피 한밤중의 꿈처럼 꿈속에만 있는 허상이라 여겼다. 그러다 문득 산책을 하던 중 밤하늘에 있는 작은 별을 보게 되었다. 작은 별은 마치 까만 종이 위에 쓰인 하얀 글자처럼 보였다. 찬란한 도심 속 빛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이 초라한 빛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별이 작지 않다고 느꼈다. 거대한 형체를 숨긴 채 내 안에서 빛은 꺼지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분명 그 빛은 꿈을 꿀 때만 볼 수 있는 광채였다. 나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세 번째 꿈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오랫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시와 글을 써 나가는 것이다. 내가 꿈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꿈은 성취나 실패로 정의할 수 없다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줄곧 꿈은 목표 혹은 결과에만 치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깊은 상실감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는 꿈을 외면한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 꿈을 간직하고 지키며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간다. 신념이 없는 꿈은 결국 꿈의 성공 유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일뿐이지만 자신의 꿈에 신념이 있다면 실패를 과정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여전히 만화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금방 좋아하다가도 금세 싫증을 내기도 한다. 무언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없으며 결과가 좋지 못하면 금방 포기한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 달랐다.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그 과정 자체가 너무나 즐거워 그만두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내가 다시 싫증을 낼지도 모른다.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적이다. 강력한 동기부여도 시간이 지나면 녹슬기 마련이다. 이들 만으로는 꿈을 꾸고자 했던 최초의 순수한 감정을 일일이 기억해 나가며 모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시와 글을 쓰는 것이 단지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것에 머물고 어떠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중단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낭만파라면 현실이 곧 우리의 꿈을 방해할 거란 걸 그리고 그런 시련 앞에 우리는 너무 연약하여 금방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러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시와 글을 계속해서 즐겁게 쓰는 것을 꿈으로 여겨 간직하고 지켜내고자 함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첫 번째 꿈도 비록 현실 앞에서 포기했지만 지켜내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으로 서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꿈인 낭만적인 사랑도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낭만의 조화로운 조율을 통해 너무 달지도 쓰지도 않은 은은한 라떼와 같은 사랑으로 낭만적인 사랑의 꿈을 간직하고 지켜냈다면 이야기의 결말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일들이지만 실패도 낭만임을 받아들이고 실패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작가들, 화가들 -에밀리 디킨슨, 반 고흐 등 - 모두 살아생전에 빛을 본 것이 아닌 죽음 이후에 별이 된 불멸의 예술인들이 더 많았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알았을 것이다. 오늘 내가 죽더라도 나의 꿈은 끝나지 않고 후세를 빛나게 할 별이 될 것임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채 굳은 신념으로 꿈을 간직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업적이 오랜 시간이 지나 비로소 먼 훗날의 역사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증명하듯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시와 글이 훗날 실패의 과정을 딛고 언젠가 빛날 거라는 낭만과 믿음을 가진 채 오늘도 글을 써내려 가기로. 비록 그 빛이 나의 죽음 뒤일지라도.



사람의 꿈은 끝나지 않고 영원하다는 만화 '원피스'의 명대사처럼 꿈은 유한한 가치가 아니다. 꿈은 이뤘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포기했다고 해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꿈을 향한 여정 자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꿈을 이뤘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꿈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여 또다시 내일을 비출 것이다. 혹여나 내가 죽음으로써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꿈을 지켜내고 간직했다면 그 꿈은 다음 세대에게 계승될 것이다. 이름 없는 시인이 내게 이름을 남긴 것처럼. 낭만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나의 꿈도 끝나지 않고 영원하리라 굳게 믿으려 한다. 간직하고 지켜내는 것, 이것이 바로 꿈에 대한 나의 낭만이자 신념이다.



결국 꿈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꿈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결정한 꿈이 곧 정답이었다. 꿈을 통해서 희망이란 별을 간직하고 빛이 나고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어린 시절에 부정당했던 장래희망도 결국엔 나를 빛낸 꿈이었고 비록 이야기의 완성을 써내지 못한 낭만적인 사랑도 나를 빛낸 꿈이었다. 나를 빛낼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 꿈이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이 있다면 부디 그 꿈을 잘 간직하고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낭만은 꿈을 꾸게 만든다. 그리고 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놓지 않는다. 늙어서도 꿈을 위해 살아가니까.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은 멋있게 늙는다. 그런 사람들은 외관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나는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 늙어서도 책을 쓰는 멋들어진 신사 작가가 될 거니까. 그렇게 나는 오늘 지더라도 또다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 아름답게 하늘을 비추다 저물지만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아름다운 노을처럼.





이전 08화거대한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