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

<3부>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

by 깜지

올해 1월, '빈칸'이라는 기관에서 주최한 글 전시회에 다녀왔었다. 글, 그림, 조형, 사진 등 장르 구분을 넘어선 작품들을 통해 프로젝트 형식의 전시를 주최하는 멋진 공간이었다. 매 전시회마다 주제와 장르는 달랐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집> : 무경계의 칸을 잇다'라는 주제의 글 전시회였다.



보통 전시회라고 하면 '보는 것'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글을 전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에 잘 와닿지 않았고 너무나 생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계에 빠지는, 예측 불가능한 낭만적인 모험과도 같아서 기대와 호기심이 나를 더 앞서 질렀다. 그날은 온통 그런 하루였다.



글 전시회는 하나의 심미적인 전시를 보기보다는 마치 한 권의 책을 읽은 것과 같았다. 수많은 작가들의 글이 걸려 있었고 전시회 주제의 본분을 다하듯 시, 수필, 산문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장르의 경계가 없는 형태의 글들이 무수히 많았다. 글자를 활용해 그림을 그려 그 안에 내용을 담은 예술 작품도 있었으며 정갈하게 타이핑하여 A4 용지로 게시한 글도 있었고 어린아이가 적은 것처럼 작은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 담은 아기자기한 글도 있었다.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의 저편에서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들을 한 공간 안에 초대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안에서 나는 개인이 생각하는 무경계에 대한 각기 다른 시선들과 이야기들을 읽어가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때때로 어느 경계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의 선 위에 서있는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세상의 틀에 박혀 살 때도 있고 어느 때는 그 누구보다 낭만을 추구하며 자유로웠다. 그 때문인지 회색분자처럼 어느 경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무경계의 삶은 외로운 삶이라 여기며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공간 안에서는 무경계는 외로움이 아닌 자유로움이라 소리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만의 자유를 글을 통해 노래하며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의 소속이, 경계가 나를 대변해 준다면 내게 어떠한 길이 주어졌을 때 내가 가고 싶은 방향대로 가지 못하거나 또는 끌려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경계 위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사실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인 이들은 자신의 내면을 더 솔직하게 마주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마주할지 피할지도 자신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특권이 있다면 자신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면 경계에 속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지 몰라도 무경계의 사람들은 거부감보다는 자유로운 모험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글을 감상한 지 얼마 안 돼서 갑자기 안내인이 나와 함께 동행했었던 시 과외 선생님(친한 동생)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혹시 괜찮으시면, 지하에서 시 낭독회가 진행될 예정인데 두 분 같이 참여하실래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무척 당황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 많은 사람들 중 갑자기 우리에게만 제안을 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사실은 그 시 낭독회는 이미 사전에 예약한 참석자들이 있었고 미리 시 한 편을 써와서 낭독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불참자가 생기는 바람에 혹시라도 즉흥적으로 참석할 사람이 있을까 해서 여쭤봤다고 한다. 그냥 어쩌다가 눈이 마주쳐 제안을 하셨겠지만 왜 하필 우리 였을까 하는 궁금함을 간직한 채 제안에 승낙했다. 이윽고 지하로 내려가 시 낭독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 낭독회의 진행은 무려 '파도 시집선'이란 책을 출판하는 파도 출판사의 대표님이 진행을 맡았다. 이미 파도 시집선을 몇 차례 읽어보기도 했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출판사 대표님의 첫인상이 상당히 강렬해서 한번 더 놀랐다. 보이쉬한 매력이 있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깃든 모습이었다. 더불어 대화에서 느껴지는 진중함 덕분에 정말 파도와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파도와 같은 그녀의 첫인상의 경이로움에 빠져 허우적 되던 찰나 의도하지 않았던 시 낭독회는 시작되었다. 조용히 참석자들의 시를 듣고 감상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무경계를 얘기하며 사유했다. 어떤 이는 무경계를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얘기하기도 했다. 대표님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유대가 어떤 경계가 없음을 얘기했다. 이들의 시를 듣다 보니 순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부터 터질 것만 같았던 영감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즉석 시 한 편을 써서 바로 사유를 나누었다. 주최 기관인 '빈칸'과 주제인 '무경계'를 엮어 내가 생각하는 경계에 대한 고찰을 얘기했다.


사이


차가운 콘크리트 벽

틈새에서 피어난 푸른 꽃의 이방인


낡고 오래된 아늑한 오두막 벽

틈새에서 피어난 푸른 꽃의 이방인


이방인의 바람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갈 곳 잃은 고행자에게

별이 되고 싶다


이방인의 바람은

달이 없는 밤의 도시처럼

빛이 없는 곳에서도

어둠을 밝힐 야경이 되고 싶다


차가운 모래알과

뜨거운 바다 사이

빈칸을 잇고 싶다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낭만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길을 잃은 나 자신을 표현했다. 그러나 꼭 어떤 경계에 속해야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 사이에서 자신의 영혼에 솔직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나누었다. 또한 누군가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나로 말미암아 위안을 얻었으면 했다. 현실과 낭만 사이 틈에서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빈칸'을 잇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 이 글처럼.



최근 나의 성향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과거엔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면 상황과 계획을 고려해 피하거나 거절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런데 요즘엔 그러한 도전이 내게 꽤 즐거운 일들로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두려울 때는 현실을 고려할 때도 많지만 그마저도 그것 역시 솔직한 나의 모습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저 조금 더 자유롭기 바라는 마음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고려하기보다는 나의 영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 낭독회 참석자들에게도 시를 사유하며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이런 자리가 지금은 내게 기쁨이자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분명 거절할 수 있었지만 제게는 나름 용기 있는 선택이었는데 이는 무경계의 자유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낭만적인 모험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러니 낭만을 사랑할 수밖에.

이전 03화매직아워